등록 : 2008.02.13 14:11
수정 : 2008.02.13 14:11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7. 호메이니의 콤 신학교 시절
검은색 터번은 ‘가문 출신’의 상징이자 ‘민중의 믿음’
|
콤 신학교 시절의 호메이니
|
만약 한 신학생이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면 사발 모양의 모자와 짧은 재킷을 벗고 터번과 망토를 착용하는 입회식을 거행한다. 이슬람세계에서 터번은 도덕과 종교를 상징한다. 1922년 호메이니는 검은 색 터번을 착용하게 되었다. 시아파에서 터번의 색깔은 크게 검은 색과 하얀 색으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검은 색 터번은 예언자 가문 출신이라는 셰예드(Seyyed)를 의미하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도 검은 색 터번을 착용하고 있고 개혁파의 상징이었던 하타미 전임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1997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하타미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은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구도도 있었지만 같은 성직자의 대결에서 하얀 색 터번을 착용한 보수파 후보 나테케 누리(Nateq-e Nouri) 보다 검은 색 터번의 성직자에게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보수적인 종교계와 민중들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그해 여름 호메이니는 콤에 도착했다. 그는 콤 신학교에서 정규 교과과정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의혹의 대상이었던 과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철학과 수피주의(Sufism)에 매료되었다. 수피주의는 일종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인간과 신의 관계를 직접적인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수피(Sufi)라는 단어는 몇 가지 유래가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그리스의 소피아(Sophia, 지혜)의 아랍어 음역 사파(Safa)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최초로 세운 메디나 사원의 맨 앞줄 예배 자리를 수파(Suffa)라고 부른 것에 기원했다고 한다. 또다른 일부에서는 수피주의자들이 입고 다닌 양모(Suf)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양털 옷을 입은 초기 수피주의자의 모습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콤 신학교 시절 수피주의 ‘샤하바디’에 매료…강좌 개설하기도
수피주의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오직 절대자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물질적 욕망을 버리고 철저한 금욕과 고행을 강조한다. 이슬람세계에서 수피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개인적 신비주의 경험에서 출발한 수피주의는 8세기경부터 뛰어난 수피 학자들이 나타나 수피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13세기에는 타리카(Tariqah)라는 불리는 수피 종단이 결성되어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일부 수피주의 교단에서는 스스로를 절대자로 자처하는 인물들이 등장해 커다란 사회 문제로 나타났다. 주류 시아파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완전한 복종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고 이에 따라 수피주의는 항상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호메이니의 정신적 성장기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쳤던 스승은 미르자 무함마드 알리 샤하바디(Mirza Muhammad Ali Shahabadi)였다. 샤하바디가 1928년 콤에 왔을 때 젊은 호메이니는 계시의 본질에 대한 한 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가 받은 대답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호메이니의 집요한 요청으로 샤하바디는 몇몇 신학생들과 함께 수피주의 강좌를 개설하였다. 호메이니는 7년 동안 그에게 수피주의 수업을 받았다. 샤하바디는 성직자의 정치참여에 관심을 가졌던 성직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레자 샤의 정책을 강하게 비난했다. 호메이니는 샤하바디를 통해서 수피주의와 정치적 관심을 결합시켰다.
코드세이란에 청혼했지만 거절…예언자의 딸 그녀 꿈에 나타나 결국 결혼
|
호메이니와 그의 친구들
|
호메이니는 테헤란 북쪽의 작은 마을 라바산(Lavasan) 출신의 무함마드 사데크 라바사니(Muhammad Sadeq Lavasani)와 항상 어울러 다녔다. 그들은 항상 함께 공부했고 여행도 같이 다녔다. 테헤란에 있는 아야톨라 미르자 무함마드 사카피(Mirza Muhammad Saqafi)는 지적이며 신앙심 깊은 호메이니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키피는 호메이니의 친구 라바사니를 통해 호메이니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라바사니는 호메이니에게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호메이니는 “나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자 “사카피에게는 결혼 적령기에 있는 두 명의 딸이 있다”고 말하면서 청혼할 것을 권유했다.
1929년 당시 27살의 호메이니는 학생이었던 15살 코드세 이란(Qodse Iran)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에는 호메이니와의 결혼을 거절했다. 그녀는 1994년 이란일간지 레살라트(Resalat)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호메이니의 청혼을 뿌리친 날 밤 꿈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가 나타나서 그와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지. 다음날 난 부모님께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씀드렸어.” 그녀는 호메이니의 처음이자 유일한 아내였고 그들의 관계는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