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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20 14:31 수정 : 2008.02.20 14:45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8. 레자 샤의 등장과 이란의 근대화

레자 샤.jpg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영국은 이란 남부를, 러시아는 이란 북부를 점령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두 차례에 걸쳐서 이란의 분할에 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에서 영국은 이란 남부를, 러시아는 이란 북부를 분할하여 관리하는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이란에 대한 영국의 정책을 변화시켰다. 10월 혁명 이후 소련은 이란에서 군대를 철수했고 영국은 소련에 대항하여 강력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영국의 새로운 정책은 이란에서 새로운 정부가 필요했다.

또한 이란 내부의 상황도 강력한 전제 정부의 등장을 요구하게 되었다. 지속적인 외세의 개입으로 이란인의 자존심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정치 분열과 종족 갈등은 이란의 치안 부재와 안보 위기로 나타났다. 이란인들은 점차 강력한 지도자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은 레자 샤의 등장을 가능케 하였다. 1921년 영국의 지원으로 쿠데타가 발생해 새로운 왕조인 팔레비조(1926-1979)가 탄생했다.

1920년 12월 이란에 있는 영국군 사령관 에드몬드 아이언사이드(Edmond Ironside) 장군은 6월 소련의 지원으로 길란(Gilan) 주에 수립된 미르자 쿠차크 칸(Mirza Kuchak Khan) 자치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셰예드 지아 알 딘 타바타바이(Seyyed Zia al-Din Tabatabai)를 통해 코사크(Cossack) 여단의 레자 칸 대령을 만나서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1921년 2월 21일 레자 칸은 타바타바이와 공모해 군대를 이끌고 테헤란에서 150 킬로미터 떨어진 카즈빈으로 진격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결국 쿠데타는 성공했고 카자르조의 젊은 아흐마드 샤(Ahmad Shah)는 타바타바이를 수상, 레자 칸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4월 레자 칸은 타바타바이를 제거하고 스스로 전쟁 장관이 되었다. 1923년 10월 26일 레자 칸은 권력을 장악한 후 아흐마드 샤를 유럽으로 추방하고 수상이 되었다.

레자 칸은 1924년 여름 왕정 체제를 폐지하고 공화정 체제를 수립하는 법안을 추진하였다. 그는 서구식 개혁을 추진하는 이웃 나라 터키의 모델을 선호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터키제국이 패배하자 터키족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은 1923년 술탄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고 이후 1924년에는 칼리프 제도를 폐지했다. 이에 따라 이란의 성직자들은 공화제를 세속적인 정부 형태라고 반대했다. 결국 레자 칸은 콤과 나자프를 방문해 종교지도자들과 만나서 논의한 후 공화제 제안을 포기했다.


레자 칸과 코사크 군대.jpg
1925년 12월 12일 의회에서 레자 칸을 샤로 선언했고 12월 15일 레자 샤는 팔레비조를 선포했다. 레자 샤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수립하기 위해서 부족 중심의 민병대를 해체시키고 근대식 군대를 창설했다. 그는 부족장들을 살해, 구속 혹은 망명시켰고 유목민들을 강제로 정착시켰다.

레자 샤는 공화국 수립의 야망을 저지당한 보복으로 성직자들을 정치적으로 냉대하기 시작했다. 1928년 3월 21일은 이란의 설날이자 라마단(Ramadan) 기간이었다. 이슬람은 믿음의 실행을 중시하여 ‘신앙의 다섯 기둥’을 제시하고 있다. 흔히 이것을 ‘오행’(五行)이라고 부른다. 이 오행은 신앙고백, 예배, 단식, 종교세, 순례이다. 단식은 이슬람력 9월 한달동안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일체의 금욕생활을 의미한다. 라마단의 목적은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복종과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정신적 훈련이자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고통을 함께 하여 무슬림의 연대의식을 권장하는 집단적 훈련이다.

이날 여왕은 콤에 있는 파티마 사원을 방문해 전통적인 종교의식에 참석했다. 이슬람식 복장을 착용하지 않은 그녀에게 성직자들은 분노했다. 아야톨라 바프키(Bafqi)는 그녀에게 “만약 당신이 무슬림이 아니라면 여기에 왜 오십니까?” “왜 당신은 베일을 착용하지 않습니까?” 아야톨라 바프키는 레자 샤를 비난하는 즉흥적인 설교를 시작했고 군중들을 선동했다. 레자 샤는 곧바로 콤으로 군대를 보내 신발도 벗지 않고 사원으로 들어가 아야톨라 바프키를 체포했다. 하에리는 레자 샤와 협상해 그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더 이상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

레자 샤는 1934년 테헤란 대학교를 설립했고 전국적인 초중등 교육제도를 도입했다.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도입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독점해 온 성직자들을 소외시키게 되었다. 또한 그는 전통적으로 재판 업무를 담당해 온 성직자의 역할을 제한하고 그 대신에 서구식 법정을 만들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성직자의 영향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레자 샤는 1936년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 착용을 금지시키고 서구식 복장을 착용하도록 강요했다. 성직자들은 이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했지만 레자 샤는 폭력과 탄압으로 일관했다. 레자 샤는 베일 착용 금지를 여성의 해방이라고 주장했다. 이슬람세계에서 여성의 베일 문제는 오늘날까지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다. 베일은 이슬람사회의 대표적인 관행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성의 노출 부분을 가리는 이슬람식 복장을 의미한다. 즉, 머리카락, 손목과 발목을 가리는 것이다. 이 논쟁은 초기에는 서구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 속에서 발생했으나 점차 정치적, 문화적 갈등 요인으로 발전했다. 베일 논쟁은 여성 뿐만 아니라 계급과 문화와 관련된 포괄적인 담론으로 등장했고 식민 담론과 저항 담론의 상징이 되었다. 문화적 열등성을 극복하기 위해 토착적 관습의 폐지가 필요하다는 식민 담론에 대항하여 이슬람 관습을 보전해야 한다는 저항 담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란을 떠나는 레자 샤.jpg
오늘날 베일 논쟁은 이슬람이 여성을 억압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베일의 착용 여부는 의복에 대한 사회적 규정이지 반드시 여성의 실질적인 권리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 시기 유명한 성직자이자 국회의원인 아야톨라 모다레스(Modares)는 레자 샤의 개혁 조치에 강하게 반발하였다가 결국 암살당했다. 레자 샤는 사실상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언론을 탄압하면서 자신의 철권 통치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정치 개입을 반대하였고 레자 샤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다.

레자 샤는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은 영국을 제치고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1941년 8월 영국과 소련을 이란을 침공하여 레자 샤를 압박했다. 결국 레자 샤는 1941년 9월 6일 그의 아들 무함마드 레자(Muhammad Reza)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추방당했다. 그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1944년 7월 26일 요하네스부르그에서 사망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상반적이다. 일부에서는 그를 ‘성공한 독재자’라고 주장한다. 비록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이란의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라고 묘사한다. 또다른 일부에서는 그의 폭정과 억압으로 인해 이란의 자본주의체제가 비정상적으로 도입되었고 이란의 전통과 관습을 약화시켰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남긴 유산이 그의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이슬람혁명이라는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되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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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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