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2.26 14:11
수정 : 2008.02.26 14:11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9. 호메이니, 수피주의자에서 정치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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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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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는 1930년대 공공연하게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레자 샤의 정책에 반대했지만 정치적인 판단과 결정은 고위급 성직자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 시기 콤 신학교의 지도자 아야톨라 하에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직자의 정치 개입을 반대했다. 1935년 6월 마샤드에 있던 아야톨라 후세인 코미(Hussein Qomi)는 레자 샤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 테헤란에 갔다. 그는 훗날 만약 레자 샤가 자신의 입장을 바꾸면 그의 발에 키스라도 할 의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시아파에서는 존경과 충성 서약의 표시로 상대방의 손 또는 발에 키스하는 전통이 있다. 일반적으로 샤 또는 종교지도자에게 이러한 의식을 거행한다. 특히, 발에 키스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대 복종과 충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레자 샤의 아들 레자 무함마드 샤는 왕위에 오른 뒤 1963년 백색 혁명을 단행하면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농민들에게 직접 토지 문서를 나누어주었는데, 그때 농민들은 그의 손과 발에 키스했다. 또한 무함마드 레자 샤가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망명하기 직전 그의 하인이 울면서 그의 발을 잡고 키스하는 모습도 있었다. 호메이니가 군중 집회에서 연설을 마치면 대규모 군중들이 그의 앞에 몰려와서 존경과 충성의 표시로 손과 발에 키스했다. 이러한 장면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지방에서 연설하고 나서 군중들과 만나는데, 그들은 그의 손 또는 발에 키스하곤 한다.
하지만 레자 샤는 그의 방문을 거절했고 오히려 그를 레이(Rey)에 있는 샤 압돌라짐(Shah Abdolazim) 사원으로 보냈고 이후 이라크로 추방했다. 마샤드에서는 레자 샤의 이러한 조치에 저항하여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지만 군대를 보내서 무력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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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자 샤에 저항하는 이란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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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호메이니는 물라 사드라(Mullah Sadra: 1571-1640)를 연구하면서 점차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 물라 사드라는 이란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수피주의, 철학, 신학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알 아스파르 알 아르바(al-Asfar al-Arbaah: 4가지 여행)이다. 그는 인간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4가지 여행을 통해서 완전한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여행은 인간이 물질 세계와 육체적 자아를 분리시켜 신 안에서 소멸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여행은 인간이 성인의 위치에서 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세 번째 여행은 ‘자아의 소멸’을 마치고 변형된 형태로 세상으로 내려오는 단계이다. 마지막 네 번째 여행은 성인이 세상으로 돌아와 대중들을 인도하는 단계이다. 호메이니는 물라 사드라를 통해서 ‘완전한 인간’이 절대적인 정의가 구현되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사회를 지도해야 한다고 파악했다.
호메이니는 1942년 “비밀의 폭로”(Kashf al-Asrar)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정치서를 출판했다. 이 책은 48일 만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사실상 알리 아크바르 하카미자데(Ali Akbar Hakamizadeh)의 “1천년의 비밀"(Asrar-e Hezar Saleh)이라는 팜플렛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카미자데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Wahhabism)을 토대로 시아파의 전통과 의식을 비난하면서 시아파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8세기 중엽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Muhammad Ibn Abd al-Wahhah: 1703-1792)은 ‘원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순수한 이슬람 또는 초기이슬람으로의 복귀 운동을 주창하였다. 와합은 이슬람사회가 낙후한 근본 원인이 전통 이슬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슬람의 교리와 쿠란을 강조했다. 그는 수피주의를 배격하고 쿠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와하비즘은 순수한 종교운동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와합은 사우드 가문의 이븐 사우디(Ibn Saud)와 전략적 동맹을 맺게 되었고 와하비즘은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이념이 되었다. 호메이니는 하카미자데를 ‘사우디아라비아의 추종자’라고 비난하면서 ‘시아파의 반역자’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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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를 문병하러 온 한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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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호메이니는 하카미자데에 대한 공격을 레자 샤의 반이슬람 정책과 연관시켰다. 그는 이 책에서 이란의 정치, 사회 및 문화에서의 폐해와 이란 민중에게 불이익을 가져오는 국제적 음모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슬람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고 정치는 다른 문제들보다도 우선한다고 강조했다. “정치 활동은 종교적 임무와 책임이다.” “정치는 국가의 통치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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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 손에 키스하는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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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의 이론과 다른 이론과의 차이는 간단하다. 호메이니는 이슬람법에 정통한 이슬람법학자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무슬림들이 봉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는 왕이 권력을 장악했고 사회체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봉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호메이니는 무슬림들이 봉기하여 그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압제자에 대한 저항은 무슬림의 첫 번째 의무이다.”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 기반 위해 새로운 이란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슬람법학자가 이슬람법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계기로 호메이니는 콤에서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호메이니의 강의는 첫 수업에서는 30명의 콤 신학생들이 출석했지만 3번째 수업에서는 5백명이 참여했다. 그는 수피주의, 철학, 정치 및 사회와 관련된 문제를 연계시켰고 기존의 주입식 수업방식에서 탈피해서 토론과 논쟁을 통한 비판적인 사고의식을 제기해 다른 수업과는 구별되었다. 그의 강의는 콤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콤 시민들조차도 참여할 만큼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테헤란과 에스파한과 같은 다른 도시에서도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훗날 이슬람혁명의 지도자 후세인 알리 몬타제리(Hussein Ali Montazeri), 이슬람혁명사상가 모르타자 모타하리(Mortaza Motahari), 1981년 수상 무함마드 자바드 바호나르(Muhammad Javad Bahonar), 제5대와 제6대 대통령 알리 아크바르 하쉐미 라프산자니(Ali Akbar Hashemi Rafsanjani)와 같은 젊은 신학생들이 호메이니의 주위에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제 호메이니는 수피주의자에서 서서히 정치가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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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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