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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26 15:04 수정 : 2008.03.26 15:20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2. 호메이니의 저항과 투쟁

권력과 타협한 성직자들에 ‘도전장’…백색혁명 거부

아야톨라 보루제르디는 진정한 종교를 보존하기 위해서 샤와 협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이러한 시각이 오히려 진정한 이슬람의 가치와 정신을 훼손시킨다고 파악했다. 호메이니는 샤의 정책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자 칸의 아들이 이란에서 이슬람을 파괴하고 있다. 나는 혈관에서 피가 흐르는 순간까지 이것을 반대할 것이다.” 아야톨라 보루제르디 사망 이후 호메이니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호메이니는 공개적으로 토지개혁 법안을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2년 10월 8일 샤는 지방과 주 의회에서 선임된 사람들에게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에 자신의 직책을 맹세하도록 한 기존의 조항을 삭제한 새로운 법안을 공표했다. 호메이니는 이것을 바하이교도에게 이란사회의 침투를 허용하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군중 속에 둘러싸인 호메이니.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바하이교(Bahai)는 19세기 중반 미르자 후세인 알리 누리(Mirza Hussein Ali Nuri: 1817-1892)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고 그를 ‘바하올라’라고 부른다. 바하올라의 의미는 ‘신의 영광’이란 뜻이다. 바하이란 용어는 바하올라의 추종자라는 것이다. 바하이교는 이슬람을 배경으로 탄생했지만 종교의 통일과 인류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독자적인 종교공동체로 성장했다. 바하이교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외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동일한 진리를 가지고 있고 인류의 통합을 위해서는 인종적, 계급적, 종교적 편견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하이교는 팔레비 왕정체제에서 크게 성장했지만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에서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날 저녁 호메이니는 아야톨라 샤리아트마다리(Shariatmadari)와 아야톨라 골파예가니(Golpayegani)를 만났다. 호메이니는 이 모임에서 콤 신학교에서 영향력있는 성직자들과 함께 단일한 전선을 설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토론했지만 성명서를 채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은 각자 독자적인 전보를 샤와 수상에게 보냈고 결국 새로운 법안은 폐지되었다.

호메이니는 상인들과의 모임을 통해서 다양한 조직을 결집시켜 ‘이슬람사회의 연합’을 설립했다. 호메이니는 콤에 찾아온 상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당신들이 조심스럽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지하드(Jihad)를 찾는 것이다. 종교 서적에 명시된 내용이 왜 사라졌고 누가 없앴는지 알아보라!” 호메이니의 이 발언은 권력과 타협한 기존의 성직자들에 대한 정면 도전을 의미했다. 호메이니는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과 지하드를 방어하는 의무를 통해서 기존 성직자들의 정치 입장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이슬람은 믿음의 실천을 중시하여 ‘신앙의 다섯 기둥’을 제시하고 있다. 흔히 이것을 오행(五行) 또는 오주(五柱)라고 한다. 이 오행은 신앙고백, 예배, 단식, 종교세 및 성지 순례이다. 신앙고백은 신의 유일성과 무함마드가 신의 예언자임을 공언하는 것이다. “라 일라하 일라 알라, 무함마드 라술 알라(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모든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차례(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 예배를 본다. 예배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메카 방향으로 행한다. 단식은 이슬람력 9월 (라마단) 한달동안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일체의 금욕생활을 의한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달을 신성한 달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달에 첫 계시를 받았고 이후 이 달을 단식의 달로 선택했다. 라마단 달에 단식을 실천하는 주된 이유는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순종과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는 정신적 훈련이고 사회적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고통을 함께 하여 무슬림의 연대의식을 권장하는 집단적 훈련이다. 모든 무슬림들은 종교세인 자카트(Zakat)를 낸다. 자카트는 아랍어 동사 ‘자카’ (몸을 정화하다. 죄를 씻어 맑게 하다)에서 유래되었다. 자카트는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유한 재산을 정화하거나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재산의 일부를 내어준다는 의미이다. 무슬림들은 재산을 소유한 지 1년 뒤부터 매년 의무적으로 자카트를 낸다. 성지 순례(Hajj)는 매년 이슬람력 12월 10일 전후하여 행해진다. 성지 순례는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행적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순례객들은 바느질을 하지 않은 두 개의 흰 천으로 만든 이흐람을 입는다. 이흐람은 무슬림들의 단결 및 인류 평등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해마다 거행되는 성지 순례는 전세계의 무슬림들에게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시아파에서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6번째 기둥으로 간주하고 있다. 지하드는 ‘노력, 시도, 애씀’을 의미한다. “알라의 길, 즉 정의의 길에서 이슬람법이 규정한 의무를 성취하기 위해 신자는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해야 한다.”(쿠란 61: 11) “알라를 위해 너희는 적과 싸워라...”(쿠란 2:186) 따라서 지하드는 첫째 악을 제거하고 신의 말씀을 보급하는데 노력하고 둘째 전쟁에 참가하여 몸을 바치고 또 무력을 사용하는 종교적 법적 의무로 정의된다. 지하드는 종교와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지하드는 이슬람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의미로 알려져 있고 그 대표적인 용어가 ‘한 손에는 칼, 또다른 한 손에는 쿠란’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역사에서는 정복 이후 이교도나 이민족을 강제로 개종시킨 사건은 없었다. 그들은 불평등한 조세 제도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교도나 이민족을 무슬림으로 개종시켰다. 또한 ‘한 손에는 칼, 또다른 한 손에는 쿠란’이란 용어는 쿠란을 비롯한 어떠한 종교 서적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다.

‘이슬람사회의 연합’은 테헤란과 콤을 시작으로 결성되어 마샤드, 에스파한 및 타브리지와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조직은 호메이니의 사상을 이란 전역으로 전파시킨 정치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호메이니는 이 조직을 통해서 재정 지원을 받아서 종교 센터를 설립했고 종교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1963년 1월 23일 테헤란의 세예드 아지졸라(Seyyed Aziaollah) 사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무함마드 타키 팔사피(Muhammad Taqi Falsafi)는 국민투표를 반이슬람적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이란은 억압받는 국가라고 말했다. “만약 국민투표를 통해 자행되는 범죄가 무엇인지 알면 당신들은 아마도 미쳐버릴 것이다. 그들은 다시 제3대 이맘 후세인의 순교를 원한다. 그들은 또다른 카르발라를 원하고 있다.” 팔사피의 연설 이후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깨진 벽돌과 병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녔고 경찰과 보안대는 사원을 봉쇄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부상당했고 일부 군중들은 체포되어 군용트럭으로 연행되었다.

테헤란의 소식을 접한 콤의 상황은 긴장감이 돌았다. 상인들과 신학생들은 단결을 표명하고자 종교지도자들의 집으로 향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샤는 다음날 콤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했다. 호메이니는 테헤란 사건의 항의의 표시로 모든 상점들의 문을 닫을 것을 호소했다. 호메이니는 무력 진압이 대중적인 지지를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의 충고와 의무를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일부 자객들이 콤에 진입해 무고한 시민들을 체포했다. 그곳에는 신뢰할만한 도움과 성직자들이 없었다. 여기에 종교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투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여론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1월 24일 오전 상점과 신학교는 여전히 문을 닫은 상태였다. 테헤란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은 샤를 환영하고자 사원 주변을 둘러쌓고 있었지만 샤를 추종하는 성직자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샤는 소작농들에게 토지 증서를 수여한 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연설했다. “ 그들은 항상 어리석고 보수적인 패거리들이었다. 그들의 뇌는 1000년 동안 회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자면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다. 검은 반동은 불건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붉은 파괴 분자들은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들에 대해서 증오감이 없다. 한 줌의 수염에서 시작해 작고 바보스러운 모임을 형성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고 소동을 일으킨 어리석은 상인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호메이니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샤의 연설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고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계속 전개했다. 1월 26일 국민투표는 실시되었고 마침내 백색혁명은 통과되었다. 호메이니는 이란 내부에 도덕적 부패가 만연되어 있다고 규정하면서 샤가 미국과 이스라엘에 전적으로 복종한다고 비난했다. “저는 이 독재정부 내부에 이슬람의 율법을 위반하고 헌법을 유린하는 범죄에 대한 해법이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슬람을 신봉하고 이란인들 마음 속에 새로운 정부를 자리매김시키는 것이다.” 호메이니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이란인들의 가슴 속에 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반대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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