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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6 17:09 수정 : 2008.04.16 17:09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4. 호메이니와 1963년 봉기-2

이라크 나자프에 있는 아야톨라 하킴(Hakim)은 이번 사태를 우려하면서 호메이니, 샤리아트마다리 그리고 골파예가니에게 나자프로 이주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호메이니는 다른 성직자들과 만나서 논의한 후 정중히 거절하기로 결론내렸다. 호메이니의 답신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주한다면 위대한 이슬람의 중심 콤은 모독과 무신의 나락으로 던져질 것이다. 우리의 형제들은 고통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신학의 중심을 지키기 위한 타오르는 불길은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신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다.”

군중에게 답례하는 호메이니
6월 3일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날은 제3대 이맘 후세인이 카르발라에서 순교한 아슈라(Ashura)이다. 아슈라에는 거리 및 공공건물에 검은 천을 걸어 놓고 사람들은 검은 색 옷을 착용한다. 오전부터 곳곳에서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제1부에서는 성직자들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 제3대 이맘 후세인이 장렬하게 싸우다 살해당하는 내용의 ‘카르발라 비극’을 읊는다. 제2부에서는 다함께 노래 부르면서 제3대 이맘의 순교를 애도한다. 이때 슬픔을 표현하는 동작은 양손으로 가슴을 치거나 쇠사슬로 온몸을 때린다. 제3부에서는 시가행렬이 이어지는데, 한 사원에서 출발해서 다른 사원으로 이동하면서 거리 곳곳을 검은 색 물결로 뒤덮는다.

아침부터 호메이니의 집 앞에는 무장 경찰과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페이지예 신학교에서 개최되는 호메이니의 연설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 앞으로 나서는 호메이니를 군인들이 막으면서 말했다. “저희들의 임무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군인입니다. 당신은 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이 무고한 사람의 피를 보길 원하지 않습니다.” 호메이니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나는 호메이니가 아니다.”

호메이니와 시위대

오후 4시 호메이니는 예정대로 페이지예 신학교로 출발했다. 호메이니가 탄 차량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호메이니를 찬양하며 제3대 이맘 후세인의 순교를 애도하는 구호를 외쳤다. 호메이니는 페이지예 신학교에 도착해서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는 1300년 전 제3대 이맘 후세인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카르발라 전투에서 전사했다면서 소리쳤다. “무함마드의 종교가 나의 피로 복귀될 수 없다면 나를 칼로 데려가도 좋다.” 그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샤에게 충고했다. “친애하는 샤여! 부적절한 행위를 중단하시오. 나는 당신이 아버지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소.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미국, 소련 그리고 영국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 국민들은 레자 샤가 떠난 것을 기뻐했습니다. 나의 충고를 들으시오. 이스라엘의 충고가 아닌 성직자의 충고를 들으시오. 그들은 당신은 도울 수 없소. 당신은 하루하루 변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달러의 친구들이오. 그들은 종교와 충성심이 없소. 오! 비참한 사람이여” 호메이니는 샤를 우마이야조 칼리프 야지드(Yazid)와 비교했다. 칼리프 야지드는 제3대 이맘 후세인을 죽인 장본인이었고 시아파에서는 저주의 대상이었다. 호메이니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은 일제히 콤 거리로 뛰어나가서 “현대의 야지드를 쓰러뜨려라!”, “독재자에게 죽음을” 하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테헤란에서는 아침 8시부터 추모행렬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제3대 이맘 후세인의 순교와 페이지예 신학교의 비극을 비교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영국대사관을 지나서 테헤란대학교 앞 부근에 이르자 10만 명의 시위대들이 결집하였다. 그들은 샤 궁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궁전 앞에 도착한 시위대들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신이여 호메이니를 구원하소서! 피에 굶주린 적에게 죽음을!” 시위는 그 다음날에도 반복되었다. 테헤란 남부 샤 사원 앞에서 집결한 시위대들은 정오에는 골레스탄 궁전으로 향했다.

마침내 샤는 호메이니의 체포와 무력진압을 지시했다. 하지만 보좌관들은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호메이니를 체포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는 무기로 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를 체포했다가 석방하는 것은 귀찮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샤의 위신을 손상시킬 수 있고 좋지 못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오후 6시부터 세파(Sepah)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무력진압이 시작되었다. 전차와 장갑차는 군중들을 향해서 돌진했고 건물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과정에서 122명이 체포되었다. 테헤란의 하늘은 검은 연기로 뒤덮혔다.

편지를 읽는 호메이니
6월 5일 새벽 3시경 특공대가 호메이니의 집을 포위했다. 호메이니의 집에는 많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특공대는 호메이니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수색하면서 그들을 매질하기 시작했다. 호메이니는 격노한 목소리를 외치면서 나타났다. “나는 루홀라 호메이니이다. 당신들은 왜 불쌍한 사람들을 폭행하고 있는가? 스스로 부끄럽지 않는가? 너희들 중 한 명이 내게 와 ‘호메이니, 이리 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나는 따라갔을 것이다.”

특공대는 호메이니를 검은 색 폭스바겐 뒷좌석에 앉혔다. 차가 출발하려고 하자 호메이니의 장남 모스타파(Mostafa)가 차에 뛰어들어 막았다. 특공대 중 한 명이 권총을 꺼내서 모스타파를 겨냥하면서 “움직이면 쏘겠다”고 소리치자 호메이니는 손동작으로 아들을 꾸짖었다. 차는 테헤란으로 향했고 모스타파는 조용한 도시에서 울부짖었다. “여러분, 그들이 호메이니를 잡아갔어요.”

호메이니의 체포는 저항의 불씨가 되었다. 이 사건은 콤에서 시작하여 이란 전역으로 분노의 물결로 치솟았다. 호메이니는 6월 3일 아슈라 연설에서 샤에게 경고했다. “만약 샤가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국민들이 그가 떠날 때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이 경고는 놀랍게도 선견지명이 되었다. 1979년 1월 16일 샤는 국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이란을 떠나게 되었다.


■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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