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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14 17:42 수정 : 2008.05.28 16:51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16. 호메이니의 망명 생활 - 터키

호메이니를 태운 군용기는 곧바로 터키의 앙카라로 향했다. 그는 이제 낯선 땅 터키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터키의 세속주의를 반대하면서 이란이 터키처럼 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반샤 투쟁을 벌여왔는데 바로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는 불바르 궁전 호텔(Bulvar Palace Hotel) 514호에 투숙했다. 그는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아들 모스타파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오늘 앙카라에 도착했다. 이곳의 날씨는 콤보다는 좋은 것 같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그는 모스타파에게 몇 가지 충고를 한 후 옷가지, 쿠란 그리고 책 몇 권을 요구했다.

호메이니의 터키 체류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이란에서 언제나 신학생들과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무명의 이방인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는 혼자서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세 번째 날 감시원은 그에게 앙카라를 보자고 제안했지만 복장 문제가 발생했다. 터키는 세속 국가로 공공장소에서 성직자의 망토와 터번 착용을 금지시켰다. 성직자 복장은 그의 존재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의미했다. 그는 이 조치에 대해서 강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터번을 착용하지 않은 유일한 사진은 터키 망명 시절이었다.

호메이니는 얼마 뒤 부르사(Bursa)로 보내졌다. 부르사는 오스만 터키제국의 첫 번째 수도였다. 호메이니는 이곳에서 또다시 모스타파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암시하기도 했다. 그는 아들에게 2년 또는 3년간 매일 예배를 올리고 10년간 단식하라고 지시했다. “집은 어머니의 소유이고 책들은 네가 가져라.”

호메이니는 부르사에서 알리 제티네르(Ali Cetiner)라는 터키 정보부 대령의 집에 거주했다. 알리 제티네르는 1987년 멜리야트(Melliyat)에 호메이니에 대한 회고록을 기고했다. 그의 부인 멜라하트(Melahat)는 호메이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평생 동안 여성을 위해서 일어나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일어섰다. 그는 또한 여성의 얼굴을 절대로 보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내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우호적으로 내게 말을 걸었고 미소 지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이슬람 복장을 착용하지 않은 호메이니.

호메이니는 하루 종일 집에 앉아있거나 걸어다녔다. 어느 날 알리는 호메이니에게 부르사에는 역사적인 사원이 많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바지와 자켓을 입고 나가자고 하자 호메이니는 “나는 바지를 입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며칠 뒤 그들은 함께 사원을 방문했다. 부르사에서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울루 자미(Ulu Cami)였다. 울루는 ‘거대한’이라는 의미이며 자미는 사원이란 뜻이고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부르사 경찰서장을 비롯한 몇몇 터키인들이 그들의 뒤를 은밀하게 뒤쫓았다. 알리의 아들 탄주(Tanju)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사원 입구에 숨어서 호메이니의 사진을 찍었다. 호메이니는 이 모습을 보고 무척 화가 났다. 알리는 호메이니를 진정시키면서 필름을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했고 자신의 사진이 이란으로 보내질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 모습은 촬영되었고 이 사진은 곧바로 이란으로 보내졌다. 팔레비 왕정은 이 사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면서 호메이니의 모습을 비난했다.

1965년 1월 3일 호메이니가 부르사로 온지 두 달이 지났을 때 모스타파가 그를 찾아왔다. 호메이니는 아들을 보자마자 “스스로 온 거니 아니면 그들이 너를 데려왔니?”라고 물었다. 모스타파는 체포되어 추방당했다고 대답했다. 호메이니는 “너의 자유도 떠나버렸다”고 탄식했다. 호메이니는 11개월 동안 부르사에서 지내면서 정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이란에서 온 추종자들은 그를 방문했고 그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이 시기 그는 시아파 법학에 관한 두 권의 개론서 타흐리르 알-와실라(Tahrir al-Wasila)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이슬람세계의 현실과 무슬림의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 “이슬람의 영토에 대한 외국인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는 결국 이슬람세계를 노예 상태로 만들고 이슬람을 쇠퇴시킬 것이다. 이러한 지배에 대항하여 외국상품의 불매운동 및 외국인들과의 거래와 협력을 금지하는 수동적인 저항을 취해 그들을 쫓아내야 한다. 모든 이슬람국가들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외국인의 공격을 퇴치하는 것은 의무이다. 이것은 전체 무슬림의 의무! 이다.”

터키 망명생활에서 호메이니의 삶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그에게 이 시기는 타국 땅에서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또한 자신의 존재가 이란인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종교 학습을 통해 자신의 이론체계를 정리하면서 다음의 행보를 서서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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