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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08 17:59 수정 : 2008.07.08 18:20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0. 1978년 혁명의 불길

팔레비 체제는 1978년 초부터 이란의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호메이니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을 감행하지만 오히려 사태는 보다 더 악화되었다. 1월 6일 이란 일간지 에텔라아트(Ettelaat)에는 ‘검고 붉은 제국주의’라는 제목으로 호메이니가 동성연애자라는 음해기사와 함께 ‘공산주의 공모자’라고 게재되었다. 다음날 콤 신학교에서는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휴교했고 “호메이니 만세”, “팔레비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규모 시위를 거행했다. 이번 시위는 이제까지의 형태와는 크게 달랐다. 그것은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샤리아트마다리조차도 강하게 반발하면서 반정부 시위에 동참한 것이다. 그는 호메이니에 대한 개인적인 중상모략에 분노했고, 호메이니가 성스러운 종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호메이니는 그동안 팔레비 체제에 동조하거나 입장을 유보한 성직자들에게 “거짓 성직자만이 샤를 지지한다”면서 비난의 칼날을 세웠다. 샤리아티마다리의 발언은 보수적인 종교계조차도 팔레비 체제에 대해서 등을 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력으로 진압하는 군대
그날 군대는 콤 시위를 무력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6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콤 사건은 타브리즈와 야즈드를 거쳐 이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슬람에서 장례식은 24시간을 넘기지 않고 가급적이면 빨리 매장을 하고 3일과 40일 추모의식을 가진다. 콤 희생자 40일 추모의식을 기점으로 타브리즈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또 1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40일 뒤에는 약 55개의 이란 도시에서 시위가 나타났고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지역은 야즈드였다.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도시로 투입된 군대는 사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했다.

8월 20일 방화 사건은 세계의 관심을 또다시 이란에 집중시켰다. 아바단의 시위대들이 경찰을 피해 극장으로 들어간 후 화재가 발생해 477명이 사망했다. 극장에서 불길이 타올랐지만 출입구는 누군가에 의해 막혀 있었다. 그날 밤 처참한 화재는 지옥같은 상황이었다. 화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질식사하거나 출입구에서 사람더미에 깔려 압사당하고 말았다. 정부는 이 사건을 광신도에 의한 방화라 고 밝혔지만 이란 국민들은 이러한 내용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반샤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다. 호메이니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면서 “샤와 그의 주구들이 이란 국민들을 태워 죽였다”라고 외쳤다. 마침내 모함마드 레자 샤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자파르 샤리프 에마미(Jafar Sharif Emami)를 새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20여년 전에 수상직을 역임한 경력이 있었고 온건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한 그는 성직자의 아들로서 신앙심이 두터웠고 종교계와도 친분이 깊었다. 그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기존의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다. 우선 부패와 저주의 대상이었던 팔레비 재단 소유의 카지노를 폐쇄했고, 작년에 공표했던 페르시아제국 달력을 다시 이슬람력으로 바꾸었다. 또한 부활당 일당제를 폐지하고 다당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너무 늦었고 타오르는 불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반샤 시위의 희생자


9월 6일 이슬람의 종교행사 라마단(Ramadan)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이드 알 피트르(Id al-Fitr, 무슬림희생제)가 열렸다. 라마단이라는 단어의 원뜻은 “엄청난 더위”라는 것으로 이슬람 이전의 태양력에서 생긴 표현이다. 이 달은 이슬람 이전의 아랍 전통에서도 신성한 달로 여겨졌고, 휴전이 이루어지는 달 중의 하나였다. 금식은 이슬람 이전 아랍의 관습에 근원을 두고 있고 또한 그리스도교의 사순절(四旬節)과 유대교의 욤 키푸르(yom kippur, 속죄의 날)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달을 신성한 달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달에 첫 계시를 받았고 이후 이 달을 금식의 달로 선택했다. 예언자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에는 “금식이란 정신적, 물질적 차원에서 절제를 뜻하며 일생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음식물을 동트기 전부터 일몰까지 금하고 모든 악의 요소로부터 멀리해야 하느니라”고 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어떠한 것도 섭취해서는 안된다. 쿠란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 달에는 일출과 일몰 사이에 모든 성인 무슬림은 먹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부부관계를 삼가는 것이 요구된다.”

라마단이 끝나는 샤왈(Shawwal, 이슬람력 10월) 첫째 날에는 그 종료를 축하하는 이드 알 피트르가 개최된다. 이날 무슬림들은 각 지역에 특별히 마련된 넓은 예배장소나 또는 큰 사원에 모여서 예배를 올린다. 어려웠던 한달 간의 금식이 무사히 끝난 것을 축하하는 이 날의 집단예배는 해가 뜬 시간부터 정오 사이에 적당한 시간을 골라서 행해진다. 무슬림들은 이날 아침 새옷으로 갈아입고 예배를 올린 다음 서로 인사를 나누며 친척과 친구들을 방문하고 선물을 교환한다. 3일동안 이어지는 축제의 첫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원에 종교적 납부금을 바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다. 무슬림들은 라마단을 고행이 아니라 축제의 시기로 여긴다. 이슬람국가들의 거리에는 골목마다 색깔 종이나 깃발 혹은 사원 모양의 조형을 내건다. 무슬림들은 저녁시간이 되면 밤마다 친척과 친구들을 방문하고 음식을 나누며 선물을 주고 받는다. 이 기간은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라마단 특수’ 현상이 나타난다.

‘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는 반샤 시위대
1978년 이드 알 피트르는 이란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와 행진이 진행되었고 약 4백만명 정도가 참여하는 정치 집회로 등장했다. 호메이니는 이 종교행사에 대해서 “압제를 와해시키고 이슬람의 목표를 전진시키는 시위는 예배의 한 형태입니다. 그 목적이 국민을 구하고 이슬람의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에 기초한 신성한 정부의 형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시위대에서는 “자유와 독립”이라는 구호 이외에도 “이슬람 통치”라는 구호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시위는 그 다음날에도 계속되었고 혁명의 물결이 높아지는 것을 본 팔레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더 이상의 시위를 금지시켰다.

9월 8일에는 ‘검은 금요일’이라고 알려진 대학살극이 발생했다. 9월 7일 계엄령 선포에 항의하기 위해 곳곳에서 항의집회가 개최되었다. 테헤란 동부에 있는 잘레(Jalah) 광장에 집결한 군중들이 나가는 모든 출구를 봉쇄한 가운데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테헤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살상했고 약 2,000여명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샤 투쟁은 점차 격화되었다. ‘검은 금요일’ 대학살극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날로 기록되었다. 모함마드 레자 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피를 뿌렸다. 이 광장은 이슬람혁명 이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순교자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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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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