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19 18:26
수정 : 2008.08.1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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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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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6. 세계 최초의 이슬람공화국 탄생
제2라운드에서는 혁명 이후 공화국의 성격을 둘러싸고 호메이니 세력과 반호메이니 세력이 충돌했다. 혁명세력들은 왕정 체제를 반대하고 공화국 수립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구체적인 방식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이 나타났다.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세력은 ‘이슬람공화국’을 선호했고 자유주의세력과 좌파세력은 ‘민주공화국’을 주장했다. 호메이니는 3월 1일 국민투표와 관련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했다.
“비록 자유는 성취되었지만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의 뿌리는 아직도 절단되지 않았다.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 경제, 군사 및 문화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 이제 곧 국민투표가 시행된다. 나는 이슬람공화국을 위해 투표할 것이며 국민들이 나와 같이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투표하는 것은 자유롭다.”
3월초 호메이니는 종교도시 콤으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9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의 콤 방문은 표면적으로 직접적인 정치 개입을 자제하겠다는 의미였지만 사실상 그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와 논의하기 위해 모래 바람을 헤치고 콤으로 찾아왔다. 또한 콤은 그에게 샤와 대항해 투쟁했던 저항의 도시이자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이기도 했다. 호메이니는 그곳에서 수많은 대중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했다. 호메이니의 이런 모습은 친근한 이미지와 함께 강렬한 종교적 감성을 이끌어냈고 TV를 통해 이란 전역으로 방송되었다. 호메이니는 TV와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부각시킨 최초의 이란지도자였다. 이제 콤은 종교도시에서 정치도시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호메이니는 콤에서 혁명 이후 자신의 구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단지 이름뿐인 이슬람공화국이 아닌 실질적인 이슬람공화국을 원했다. 그는 서구의 법을 폐지하고 이슬람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서구의 문화적 영향력을 근절시켜 진정한 이슬람 정부를 수립하자”고 강조했다. 3월 30일과 31일 이틀간 진행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7 퍼센트가 이슬람공화국을 지지하는 찬성표를 던졌다. 4월 1일 호메이니는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신의 정부의 첫 번째 날’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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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와 대학생들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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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와 여성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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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란 정국은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피 비린내 나는 무법천지였다. 거리에는 헤즈볼라(Hezbollah: 신의 당)라는 자위대가 구성되어 곳곳에서 무력행사를 저질렀다. 헤즈볼라의 지도자는 호자톨에슬람 하디 가파리(Hadi Ghaffari)였는데, 이 단체는 호메이니에 도전하는 시위대와 언론사를 공격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파는 이슬람 급진파 포르칸(Forqan)이었다. 포르칸은 1977년 결성된 비밀 종교그룹으로 ‘성스러운 책’이란 의미를 가진 포르칸 잡지를 통해 활동하면서 명칭이 결성되었다. 포르칸은 쿠란과 알리 샤리아티의 진정한 추종자들로 자처하면서 ‘물라 없는 이슬람’을 주장했다. 포르칸의 지도자는 마흐디 바자르간(Mahdi Bazargan)이었고 비성직자 이슬람 단체였고 호메이니를 반대하면서 그의 측근들을 암살했다. 그 최초의 희생자는 5월 1일 호메이니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던 모르타자 모타하리였다. 모타하리의 암살은 호메이니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호메이니는 평소 그답지 않게 ‘내 삶의 결실’을 잃어버렸다고 감정을 드러냈다. 모타하리의 추모식에서 호메이니는 손수건을 꺼내서 흐느껴 울었다. 포르칸은 호메이니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세력과 좌파세력도 공격했다. 포르칸은 1979년 중반 이후 임시정부의 집중 탄압으로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바자르간 수상은 300명 규모의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헌법 제정을 논의하자고 제안했지만 호메이니에 의해 거부당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70여명의 전문가회의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했다. 호메이니는 자유주의세력과 좌파세력을 공격목표로 삼아 ‘혁명에 반대하는 자’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면서 “우리의 소망은 이슬람 헌법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이란의 대표적인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모함마드 카젬 샤리아트마다리(Seyyed Mohammad Kazem Shariatmadari)가 공개적으로 호메이니의 견해를 반대했다.
샤리아티마다리는 1905년 타브리즈(Tabriz)에서 태어났고 성직자의 정치 개입을 반대한 온건한 입장을 표방하면서 1961년 보루제르디 사망 이후 마르자예 타클리드로 인정받았다. 또한 호메이니의 망명기간 동안 콤 신학교의 교육 문제 뿐만 아니라 이란종교계의 최고 권위자로 추앙받았다. 샤리아티마다리는 무슬림인민공화당을 창당하여 호메이니와 이슬람공화당을 반대했다. 호메이니와 샤리아트마다리는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이슬람으로의 복귀에 대한 내용과 이슬람공화국의 성격에 관한 견해 차이에서 나타났다. 이 차이점은 이슬람법을 해석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이를 20세기에 적용하는 문제에서 발생했다. 호메이니는 순수 이슬람시대의 이상적 형태로 완전한 복귀를 주장했다.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통치와 제4대 칼리프이자 제1대 이맘 알리의 통치를 그 모형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이론과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인정했다. 즉 이슬람은 가장 우수한 이론체제이지만 무슬림들이 처한 오늘날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모순을 해결해 보고자 했다. 반면에 샤리아트마다리는 19세기말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 1905년 죽음)가 주장한 이슬람의 현대화 운동과 밀접하다. 무함마드 압두는 현대화 운동을 합법화시키는 도구로서 이즈티하드(Ijtihad)를 간주하지 않았다. 샤리아트마다리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알리 이후 이슬라사회의 변화를 인정하고 현대사회의 요구조건에 맞게 이슬람 교리를 적용시키는데 이즈티하드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는 이슬람공화국이 예언자 무함마드와 알리의 통치와는 달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신의 뜻에 의한 신의 ! 대리인들이었다”고 강조하면서 “반면 현재는 어떤 예언자나 이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국가의 지도자는 일반사람들에 의해 선출되고 해임되는 보통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법을 유일한 원천으로 삼았다. 하지만 샤리아트마다리는 더 포괄적인 입장을 취하여 “이슬람 원리들이 적용되는 이슬람식 질서를 주장했다.
둘째, 민주주의 접근방법에 대해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반왕정운동의 주요 목표가 독재통치를 끝내고 이슬람법에 따라 국민 의지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건립이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무엇보다도 정의가 민주주의정치의 선행조건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샤리아트마다리의 공화국 개념은 서구식 민주주의와 밀접하다. “이슬람정부는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이다.” 이슬람국가에서는 “국민이 주권자이다.” “이슬람공화국은 어떤 독재나 전제정권도 있을 수 없고 국민이 스스로 결정하는 국민 스스로가 주권자임을 의미한다.” 한편 호메이니도 주요 목표로 사회정의를 주장했다. 호메이니의 주요 관심대상은 소외자(mostazefin)에 있었고 ‘이슬람공화국’의 국민주권이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셋째, 성직자의 정치참여에 대해서 견해차이가 보였다. 호메이니는 9세기 제12대 이맘이 사리진 이래 모든 세속적 통치자를 통치권의 찬탈자로서 간주했다. 반면에 성직자들을 무슬림사회의 정신적 문제 뿐만 아니라 세속적 문제에서까지 유일한 합법적 권위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샤리아트마다리는 성직자의 정치참여가 단지 안내자, 교사 및 관리자로서의 역할로만 제한시켜 놓고 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성직자의 역할은 이슬람의 옹호이자 이슬람정치원리인 정의의 수호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교사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성직자의 역할은 국가행정에 직접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의 변호사로서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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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는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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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타하리의 추모식에서 눈물흘리는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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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아트마다리는 호메이니의 제안으로 구성된 혁명평의회와 혁명재판소를 격렬하게 비난했고 호메이니안으로 구체화된 헌법조항을 반대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1979년 12월 제헌헌법 인준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 보이코트할 것을 주장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헌법조항 중에서 최고지도자의 권한(제5조, 제110조)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샤리아트마다리와의 논쟁에서 승리했다. 샤리아트마다리는 팔레비체제에서 군주제에 협조했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80년 11월 미대사관 인질사건에 대해서 “이 행위는 반이슬람 행동”이라고 반대했다. 이와 같은 샤리아트마다리의 주장이나 행동은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8월 18일에 구성된 73명의 전문가회의는 시아파 성직자의 역할을 강조한 헌법 초안을 입안해 11월 15일 임시정부에 제출했고 12월 2일과 3일 국민투표를 통해 98%의 지지로 이란이슬람공화국 헌법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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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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