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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02 01:42 수정 : 2008.09.03 19:34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28. 미 대사관 인질 사태와 ‘스파이 소굴’

1979년 10월 22일 이슬람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 중인 모함마드 레자 샤는 췌장암 치료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입국했다. 미국에는 구정권의 많은 고위 관리들이 운집해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에서는 모함마드 레쟈 샤의 미국 입국을 단순한 의료 치료가 아니라 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의미한다고 파악했다. 그것은 1953년 8월 미국 CIA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샤의 권좌 복귀가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두려움에 기인했다. 호메이니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분노하면서 ‘미국의 음모’를 보여준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을 처음으로 ‘거대한 사탄’이라고 언급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미국과 이란 사이에는 서서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란은 즉각적으로 모함마드 레자 샤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란의 거리에서 대규모 규탄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고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앞에 모인 군중들은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때 바자르간의 운명을 바꿔 버린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바자르간은 11월 1일 알제리 혁명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알제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카터 미 대통령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났고 두 남자가 서로 악수하는 장면이 사진에 찍혀 이란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사진 한 장은 바자르간의 파멸을 가져왔고 이후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규정짓는 서막의 시작이었다. 바자르간과 브레진스키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슬람공화당의 바자르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의 빌미가 되었고 자유주의세력에 대한 총공세로 이어졌다.

11월 4일 대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의 담을 넘어가 건물을 점령하고 90명을 인질로 잡았다. 대학생들은 여성들과 흑인 군인들을 곧바로 풀어주었지만 나머지 52명은 정치적 볼모로 억류되었다. 그들은 인질 석방의 조건으로 모함마드 레쟈 샤의 소환을 요구했다. 미 대사관 인질 사태는 444일간 지속되었고 카터 민주당 정권이 재선에 실패하고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악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후 이란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미대사관 인질사태.


미 대사관 인질 사태에 반발하면서 바자르간은 11월 6일 사임을 발표했다. 호메이니는 바자르간의 수상 사임 소식을 듣고 혁명위원회의 주요 인물들인 베헤쉬티, 무사비 아르데빌리(Musavi Ardebili) 그리고 바호나르(Bahonar)를 콤으로 불렀다. 호메이니는 그들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 너희들이 국가를 운영하면 된다. 국민들은 자신의 의무를 다 할 것이다”며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와 같은 향후 일정을 지시했다. 훗날 호메이니는 바자르간의 임명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실수를 했다. 우리는 혁명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두 개의 그룹이 존재했다. 한 그룹은 신학교에서 나왔고 다른 그룹은 밖에서 왔다. 우리는 혁명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혁명적인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실수를 했다. 우리는 무기력한 사람이 아닌 젊고 굳건한 후보자를 임명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당시 우리는 그런 사람이 없었고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우리는 바자르간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세계의 언론은 미 대사관 인질 사태를 집중보도하면서 호메이니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는 며칠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만약 호메이니가 즉각적으로 대학생들을 지지했다면 자유주의 세력이 곧바로 반격에 나섰거나 미국이 이란에 대한 최후 통첩을 보냈을 것이다. 호메이니는 상황을 주시하면서 국제사회의 반응과 이란 내부의 역학 관계를 면밀히 검토했다. 이틀 뒤 호메이니는 미국이 “나쁜 행동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공개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의 군사 개입은 무의미하다. 미군이 어떻게 이 나라에 간섭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전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미국이 세계를 이해시키고 여기에 개입할 수 있을까? 미국은 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호메이니는 바니 사드르 외무장관에게 이 사태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하자고 설명했다. “이 행동은 많은 이득이 있다. 미국은 이슬람공화국이 뿌리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인질들을 유지하고 이후 그들을 석방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감히 우리에게 대항할 수 없다. 우리는 국민투표로 헌법을 제정하고 이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치러야 한다.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끝내고 나서 인질들에게 자유를 허락할 수 있다.”

미대사관 인질사태.

호메이니는 미 대사관 인질 사태를 이란의 국내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제2의 혁명’으로 파악했다. 미 대사관을 점령하고 있던 대학생들은, 대사관을 출입했던 이란인들의 명단과 행적을 비롯한 다양한 파일에 접근할 수 있었고 50권 분량의 비밀 공문서를 출판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미 대사관을 ‘스파이 소굴’이라고 불렀다. 미 대사관 인질사태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미국의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유일무이한 사례가 되었고 이후 미국의 재외공관은 주요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슬람혁명과 미 대사관 인질 사태 그리고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의 침공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80년 1월 23일 카터 미 대통령은 “페르시아만 지역을 지배하려는 어떠한 외부 노력의 시도도 미국의 중요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며 이러한 공격은 군사적 방법을 포함한 모든 필요한 수단에 의해 저지될 것이다”라는 카터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중동의 원유가 ‘미국의 석유’이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호할 것이라는 것이고 이를 위해 신속배치군을 창설했다. 카터 독트린은 구체적으로 이란을 목표로 삼고 있고 이후 미국은 이란에 대한 본격적인 봉쇄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의 이란봉쇄정책은 중동정책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크게 세 가지 전략목표를 가지고 있다. 안정적인 석유자원의 확보, 대소련 방어망 구축, 이스라엘의 안보. 이러한 미국의 전략 목표는 탈냉전 시대에서도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단지 대소련 방어망 구축에서 ‘이슬람의 위협’으로 변화되었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기본적으로 한편으로 이스라엘, 또다른 한편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축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란이 미국의 혈맹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와 관련되어 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산유국들은 서방국가들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발표했고 이에 따라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세계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당시 아랍국가가 아닌 이란은 이 조치에 동참하지 않았다. 제1차 오일쇼크 이후 미국은 이란을 강력한 우방국으로 규정하면서 양국사이에는 혈맹관계가 형성되었다. CIA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총석유수입량 가운데 이란석유의 비율은 1973년 5.9%에서 1978년 9.1%로 증가했다. 또한 미국의 대이란수출량도 1973년에서 1978년 사이에 7배로 늘어났다. 이 기간동안 이란은 190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미국으로부터 구입했다. 그 시기 미국은 이란을 ‘중동의 헌병’이라고 불렀고 이란을 통해 중동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자주, 자유, 이슬람공화국’라는 혁명구호에서 나타났듯이 이슬람혁명은 반샤 투쟁이자 반미운동이었다. 이는 곧 미국의 중동정책에서 커다란 파열구가 나타난 것이다.

사색하는 호메이니.

1980년 4월 24일 밤 미국은 마침내 인질 구출 작전을 시도했다. ‘독수리 발톱 작전’(Operation Eagle Claw)으로 명명된 이 구출 작전은 특공대원 90명이 테헤란의 남동부에 위치한 타바스(Tabas) 사막지대에 비밀리에 침투했다. 그러나 헬리콥터 8대 가운데 2대가 고장을 일으켰고 야간철수하는 과정에서 헬리콥터 1대와 수송기가 모래 폭풍 속에서 충돌해 승무원 8명이 사명하고 4명이 부상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번 사건으로 1977년 11월에 창설된 델타포스(Delta Force)의 실체가 확인되었지만 전술 부재, 지도부의 무능 및 현지정보 부족과 같은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항상 멋지게 작전을 수행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국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신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인질이 풀러나면서 미 대사관 인질사태는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이란은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이 관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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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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