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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를 찾아온 하메네이와 라프산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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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호메이니의 최후
1989년 6월 3일 오후 1시 호메이니가 입원해 있던 테헤란 북부 병원으로 그의 가족들이 방문했다. 그 전날 호메이니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곧 신을 만날 것이라면서 특유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길이다.... 너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켜 보거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머무르고 싶은 자는 남아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가도록 해라. 불을 끄거라. 나는 자고 싶구나.” 이것은 이란의 현대사를 새롭게 쓰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걸어왔던 사람의 마지막 말이었다. 호메이니는 아들 아흐마드와 딸 자흐라의 시중을 받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후 3시경 호메이니는 의식을 잃었고 두 번째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호메이니의 죽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날 저녁 테헤란의 거리에는 호메이니의 건강에 대한 수많은 소문들이 나돌았다. 오후 8시 30분 이란방송에서는 호메이니가 약간의 합병증 증세가 있다고 보도하면서 “이맘을 위해 기도합시다. 당신의 기도를 전지전능하신 신께서 들어주시기를!”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오후 3시 30분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약 20여명의 정치지도자들이 병원으로 가서 호메이니가 입원한 옆방에 모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호메이니 이후 이란의 권력구도를 논의했다. 라프산자니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맘은 하늘만을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들은 호메이니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심장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오후 10시 호메이니는 또 다시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10시 20분 모니터의 심전도 그래프가 수평이 되었다. 이것은 호메이니의 죽음을 말해 주었다. 아흐마드와 자흐라가 호메이니에게 작별의 키스를 했다. 호메이니는 병원으로 입원하기 전 가족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그것은 신의 뜻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가족들과 측근들의 통곡소리가 퍼져 나왔다. 호메이니의 사망소식은 곧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전문가회의에서 새로운 최고지도자를 선출할 때까지 보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6월 4일 오전 5시 30분 라디오에서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쿠란을 암송했다. 오전 7시 라디오에서는 흐느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높은 정신은 거룩한 천국으로 갔습니다. 기나긴 포악의 밤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새벽의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라디오 보도 이후 하메네이 대통령, 라프산자니 군총사령관 대리, 아르다빌리 사법부 수장, 무사비 수상은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예언자와 이맘 이후 이슬람 역사에서 최고의 신적인 인물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40일간 애도의 기간을 선포하면서 5대 국경일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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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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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새로운 최고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전문가회의가 개최되었다. 알리 메쉬키니(Ali Meshkini)가 의장으로 호메이니의 유언장을 뜯었고 하메네이는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3시간동안 그것을 읽었다. 29쪽 유언장은 1982년에 작성되었고 1987년에 수정되었다. 유언장은 대부분 종교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호메이니는 쿠란, 예언자 및 이맘에 대한 신앙심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쿠란과 하디스(Hadith: 예언자의 언행록)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공화국을 보전하고 강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라고 이란의 각계각층에게 호소했다. 호메이니는 사우디 왕가를 ‘신에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면서 맹렬하게 비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왕(Fahd; 1923-2005)은 이슬람과 신성한 쿠란을 악용하고 있고 와하비즘(Wahhabism)은 토대가 없고 미신과 같은 신앙이라고 지적했다. 호메이니는 유언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두 개의 위대하고 귀중한 것, 즉 쿠란과 자손을 여러분에 두고 떠납니다. 그것들은 깊은 연못에서 나를 만날 때까지 결코 분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축복과 함께 나는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차분한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한다. 신의 축복 속에서 행복한 영혼과 충만한 희망이 함께 있기를. 이제 나는 영원한 공간으로 여행할 것이다. 나는 전지전능하신 신께 나의 결점과 실수에 대한 사죄를 받아들여주기를 간청드린다. 나는 이 국가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국가는 하인의 이탈을 철의 성채로 감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명예로운 하인은 당신의 봉사 속에 있다. 신은 이 국가와 세계 피억압 민중의 수호자이다.” 6월 5일 새벽 호메이니의 시신은 테헤란 북부 언덕의 황야로 옮겨졌다. 시신은 유리 관 안에 놓여졌고 하얀 천으로 덮여졌다. 그의 발은 메카를 향했고 검은 터번은 그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임을 상징했다. 몇 시간 만에 수많은 검은 색 옷을 입은 조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기 때문에 8명이 목숨을 잃었고 4백여명이 부상당했다. 그들에게 호메이니는 살아있는 성인이었고 종교의 상징이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정권을 비난했지만 죽음을 통해 호메이니는 정치를 뛰어넘었다. 그해 여름 무더운 날씨 속에서 소방관들은 조문객들에게 호스로 물을 뿌렸다. 혁명수비대는 사람들과 관 사이에 배치되었다. 남성들은 스스로를 구타하며 통곡했다. 실신한 사람들은 군중의 머리 위로 들 것에 실려 운송되었다. 남성들의 뒤에는 여성들의 통곡이 있었다. 정치인들이 하나씩 다가와 호메이니의 시신에 애도를 표했다. 라프산자니는 헬리콥터로 도착했으나 시신에 근접할 수가 없었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어디에 묻힐 것인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처음에서 종교도시 콤에 매장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지만 혁명과 전쟁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테헤란 남쪽에 위치한 베헤쉬테 자흐라로 결정되었다.
6월 6일 화요일 골파예가니는 호메이니의 시신 옆에서 추모행사를 이끌었다. 골파예가니의 주도로 엄숙한 가운데 약 20분 동안 추도식이 진행되었다. 전날보다도 더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당초의 계획은 테헤란의 거리를 행진하여 무덤으로 향하는 것이었지만 불과 몇 마일을 가지 못한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혁명수비대는 허공을 향해 발포했고 물대포를 쏘기도 했지만 군중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테헤란 북쪽 거리에서 베헤쉬테 자흐라까지는 검은 옷을 입은 조문객들만이 있었다. 마침내 헬리콥터로 시신을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헬리콥터가 도착해 호메이니의 시신을 옮기자 군중들은 달려들었고 시신을 싼 천은 그들의 손에 찢겨서 그들의 유품이 되었다. 베헤쉬테 자흐라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나무와 버스 위로 올라타고 버스의 지붕이 무너져 승객들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호메이니는 생전에 죽음을 인내심으로 맞이하라고 말하곤 했다. “남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얼굴과 몸에 흉터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호메이니 자신의 죽음과 비교해 보면 매우 아이러니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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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의 장례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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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는 사라졌지만 그의 유산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의 종교적 리더십과 정치제도는 이슬람세계에서 성직자들의 역할을 강화시켜 이슬람원리주의운동을 확산시켰고 새로운 이슬람국가의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그의 새로운 민족정신과 자아상은 서구세계에 맞서 당당하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이란의 자존심을 지키며 버텨왔다. 그는 미국을 ‘종이호랑이’에 비유하면서 반미주의를 강조했고 반미주의는 이슬람공화국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주도했던 이슬람혁명과 이슬람공화국을 전세계 무슬림들의 세계적인 각성을 위한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지배에서 비롯되는 위험성, 이슬람세계를 전복시키기 위한 이스라엘의 지칠 줄 모르는 행동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중동국가들의 굴복을 경계하면서 이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호메이니의 시각은 국제사회에서 이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이슬람공화국은 이슬람 이데올로기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가치를 수호하는 사람들은 이 체제를 찬양한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이슬람 가치의 적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체제를 비판하고 이슬람의 가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를 반대한다. 호메이니 사후 이슬람공화국은 이러한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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