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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6 19:02 수정 : 2008.05.02 15:23

꿩의바람꽃(왼쪽)과 복수초(오른쪽).

[환경 현장]식물 ‘준 분류학자’ 양성현장 가보니

제비꽃만해도 민둥메 둥근털 알록 고깔 등 갖가지
이론 학습과 함께 태백산, 주흘산, 방태산 등 답사

“산에 가서 봄꽃 150종은 완벽하게 알아야 합니다. 천마산에서만 55종을 가릴 줄 알아야죠.”

지난 12일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산 들머리에 모인 ‘식물 준 분류학자 워크숍’ 참가자들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의 말에 아연 긴장했다.

산에 나는 것은 산수유가 아니라 생강나무이고, 진달래와 달리 철쭉은 꽃보다 잎이 먼저 난다는 것쯤은 다들 아는 눈치였다.

“천마산에 많은 꿩의바람꽃이나 만주바람꽃에서 꽃잎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꽃받침입니다. 꿩의바람꽃에는 아예 꽃잎이 없죠.” 식물의 특징에 관한 설명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제비꽃만 해도 민둥메제비꽃, 노랑제비꽃, 둥근털제비꽃, 알록제비꽃, 잔털제비꽃, 고깔제비꽃 등 구분하기 힘든 것들이 잇따라 나타나자 참가자들의 표정은 차츰 심각해졌다.

“꽃만 봐서는 안 되고 잎을 보고도 복수초를 알아야 합니다.” ‘잔소리’가 이어졌다. “낙엽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는 눈을 길러야죠.”


60시간 수료하면 정식 분류학자 도와 생태조사 참여 가능

이날 천마산의 봄꽃 공부에 나선 이들은 전·현직 교사, 연구자 등 9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준 분류학자’ 양성 과정 참가자들이다.

이들은 이론학습과 함께 다음달까지 태백산, 주흘산, 방태산 등에서 강원과 중부 고산지대의 봄꽃을 공부한다. 오는 8~9월 진행될 2기 과정에서는 설악산, 가야산, 소백산, 덕항산에서 여름꽃과 가을꽃을 익힌다.

현 소장은 “이론과 현장수업 60시간을 수료하면 정식 분류학자를 도와 생태조사에 참여할 능력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배운 지식은 학교수업과 지역사회 자연보전에 기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순전히 꽃이 좋아 공부 길에 접어든 아마추어들이다. 천마산은 화사한 봄꽃들로 이들을 맞았다.

점현호색(왼쪽)과 얼레지(오른쪽).
천마산에서 한국 특산 신종으로 보고된 점현호색이 산 들머리와 중턱까지 푸른 고깔 모양의 꽃으로 수를 놓았지만, 오남리 계곡 아래에선 흰현호색으로 바뀌었다.

무리지어 만개한 얼레지가 정상 부근의 사면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얼레지는 7년을 자라야 꽃을 피우는데 잎을 떼내면 생장이 멈춘다”고 현 박사가 설명했다. “나물로 무치면 맛있다”는 말이 쑥 들어갔다.

천마산은 봄꽃을 공부하기엔 최적의 장소다. 바람꽃 등 깊은 산에서만 자라는 북방계 식물을 수도권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계곡이 많고 흙이 많은 산이어서 야생화가 자라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호평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등 봄꽃의 전당은 ‘동네 뒷산’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9시간 산행 마치자 비로소 참가자들 눈에 ‘새 꽃’ 피어

맹독성 물질을 품고 있는 미치광이풀. 요즘 한창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다.
참가자들은 “식물종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면 산에 다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바위틈에는 무늬족도리가 종 모양의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있었고, 올괴불나무는 나른 나무들은 꽃도 피우기도 전에 작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 먹는 것은 실은 산달래이고 천마산에 피어있는 것이 달래란 사실도 알았다. 잎을 문지르자 강한 향이 났다. 다 비슷비슷해 보이던 금괭이눈, 산괭이눈, 애기괭이눈의 차이도 9시간의 산행을 마친 참가자들의 눈에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꽃 하나 안에 여러 암꽃과 수꽃이 들어있는 개감수와, 꽃자루 하나에 5개의 꽃이 붙어있는 특이한 식물인 연복초의 꽃을 분해하는 손끝에 진지한 눈길이 모아졌다.

한국어 강사인 미국인 자넬 앤더슨은 “제비꽃 말고는 야생화가 낯설었지만 꼭 보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길선 서울 월촌중 도덕교사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명존중을 가르치는 데 이번 워크숍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소감을 말했다.

올괴불나무.
최근 숲안내, 에코가이드 등 일반인에게 자연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러나 체계적인 생물분류 교육을 받지 않으면 모처럼 자연에 들어와서 알맹이 빠진 설명에 그칠 우려가 크다. 가뜩이나 부족한 생물분류학 교수들이 일반인 상대 교육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워크숍 강사인 신현철 순천향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준 분류학자를 양성한다면 일반인을 위한 교육자 구실을 할 수 있다”며 “전문적 연구가 필요한 일만을 분류학자에게 맡기는 역할분담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남양주/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열쇳말>

준 분류학자=필수적인 훈련을 받은 뒤 분류학자를 도와 동·식물의 분류, 표본 채취와 제작 등을 하는 인력. 1980년대 중반 중미 코스타리카 생물다양성연구소(INBio)가 처음 도입했다. 열대우림 파괴로 멸종이 가속돼 소수의 학자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현지 주민을 교육시켜 조사작업에 나섰다. 파푸아뉴기니, 가이아나 등 다른 열대국가로 확산됐다.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부족한 연구인력을 보충하고 멸종위기종을 모니터링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일본 홋카이도대학은 곤충, 어류, 화석 등 폭넓은 분야의 준 자연분류학자를 기르는 강좌를 해마다 연다.

분류학은 자연연구 기초…‘배고픈’ 학문이라 고사 위기

<국내 생태조사 전문가 실태>

박사 실업자가 넘쳐난다지만, 국립생물자원관은 박사급 식물분류학 전문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는데도 1년이 다 되도록 신청자가 없어 뽑지 못하고 있다.

동·식물 종을 가리는 분류학은 자연 연구의 기초이자 다윈 이래 오랜 전통을 지닌 학문 분야이다. 그러나 취업이 힘들고 연구비도 부족한 ‘배고픈’ 학문으로 알려져 지원자가 줄어든 데다, 대학마저 생물분류학 전공자의 자리를 인기 있는 분자생물학 전공으로 바꾸거나 아예 자리를 없애고 있어 학문이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

최근의 예로, 우리나라 어류학계 권위자인 김익수 전북대 교수가 지난 2월 정년퇴임했지만 그 자리는 다른 분류학자로 채워지지 않고 공석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특정한 학문 분야를 넘어 국가경쟁력의 기초를 흔든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도 가입한 유엔 생물다양성협약은 생물자원에 대한 주권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정부도 생물자원이 국가경쟁력 향상의 초석이라고 인식해 야생 동·식물보호 기본계획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동·식물을 조사할 인력은 크게 부족하다. 한반도에 분포할 것으로 추정되는 생물 약 10만종 가운데 약 3만종만이 알려져 있는 등 미비한 기초조사는 당연한 결과이다.

아마추어 식물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지난 12일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산에서 열린 첫 워크숍에서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이 식물의 특성과 분류 방법을 강의하고 있다.
유태철 국립생물자원관 고등식물연구과장은 “시급한 생태분야 기초조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준 분류학자를 육성하는 사업을 생물다양성협약 사무국 등 국제기구에서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며 “일본에서는 이런 준 전문가가 전문가 이상의 기여를 한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자연환경보전법에 따라 10년마다 전국의 자연환경조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새 정부는 의욕적으로 이를 5년 간격으로 단축할 예정이다. 생태조사 인력이 앞으로 2배로 늘어나야 한다. 현재 자연환경조사에는 460명의 연구자가 투입되고 있으나 절반은 대학원생들이다.

게다가 전국을 2만5천분의 1 지형도의 격자 822개로 나눠 조사하던 것을 5천분의 1 지형도로 더욱 정밀하게 나눠 조사할 계획이다. 환경부는 우선 수도권에서부터 이 방침을 적용할 예정이지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재화 국립환경과학원 연구관은 “원활한 환경조사를 위해서는 전문가뿐 아니라 이를 지원할 준 전문가의 양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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