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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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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칼럼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구약성서 창세기는 엿새 동안의 창조를 이렇게 평했다. 몇 해 전 영국은 광우병 때문에 온 나라의 소란 소는 모조리 불에 태웠다. 그렇게 죽어간 소가 500여만 마리. 당시 텔레비전에 비친 그 광경은 ‘지옥도’ 바로 그것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요즈음 도살처분을 당하는 이땅의 닭·오리 수천만 마리도 그렇다. 포대에 산 채로 넣어 구덩이에 던지고 포클레인으로 덮는다.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는 ‘누’를 놓치면 굶어죽는다. 이 세상이 조물주 보시기에 참 좋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 앞 구절은 이렇다.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모든 짐승들이 고기가 아니라 ‘푸른 풀’을 먹는다니 좀 앞뒤가 맞는 듯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최신 우주론에 따르면 팽창이 시작된 이후 10-³⁵ 초 뒤 우주의 크기는 반지름이 겨우 3㎜였단다. 이 3㎜ 안에 모든 존재가 다 들어 있었다니. 그럼 그 3㎜ 밖에는 무엇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우주에는 바깥이나 끝이 없으니 그렇단다. 시작부터 10²⁷초가 지난 지금 우주의 크기는 3×10²⁷㎝. 호킹이 교회지도자를 만났을 때 빅뱅 그 자체는 빼고 빅뱅 이후만 연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지만 대다수 종교들은 우주며 신을 그저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 기껏해야 역사가 50만년에 불과한 호모사피엔스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엊그제 산을 내려오다 초파일 뒤끝의 절을 지나쳤다. 족히 천개는 넘어보이는 연등에 저마다의 소원이 적혀 있었다. 모두 나와 가족의 건강, 부귀를 빌었다. 소나 닭, 오리 같은 생명 공동체는 그만두고라도 가난한 이웃이나 남북, 인류 공동체의 행복을 비는 글귀는 전무했다. 2006년도 우리 국민소득은 1만8천달러다. 돌아보면 1960년대까지도 서울의 초등학교에도 옥수수빵이 급식으로 나왔다. 삼겹살 굽는 게 일반화된 것이 80년대 이후다. 이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맞아 쇠고기의 안전을 걱정하게 되었다. 고기며 회 같은 먹거리가 대중화된 것을 넘어서서 지식과 정보, 글쓰기도 대중화되었다. 때가 어느 땐데 대통령 한 사람이 온국민의 건강을 좌우하겠다니 이 상황을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2만달러 시대에 대통령 한 사람이 그것도 5년 동안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제도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 중심제의 권력독점이나 양극화를 불러오는 신자유주의를 걱정하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농부가 풀먹여 소를 키우려면 두 마리가 최대요, 소뼈가루 안 먹인 고기는 질기다. 온 국민이 마블링이 잘된 연한 소고기를 먹고 싶어한다. 그러니 소들은 평생 반평 크기 우리에 갇혀 소뼈가루를 먹다가 서른 달도 못 살고 사람들을 위해 죽어주어야 한다. 애초 겨우 3㎜ 크기였던 우주에는 ‘나’가 너무 많다. 너도 나도, 비정규직도, 아프리카 사람들도, 소도 닭도 오리도 모두모두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오래 살고 싶다.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이 ‘존재’의 어긋난 꿈. 약육강식의 이 세계에서 창세기에 나오듯 ‘푸른 풀’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덜 먹고 덜 편하고 맛있는 것 덜 찾는 것 이외에는 수백만 소를 불태우는 저 지옥도를 벗어날 길이 없다. 부디 내년 초파일 연등에는 광우병 고기 걱정하는 ‘나’뿐 아니라 광우병 걸린 소를 생각하는 마음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김형태 변호사■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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