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18 21:16
수정 : 2008.08.18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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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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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칼럼
엊그제까지만 해도 마당의 토란잎이 타들어갈 정도로 햇볕이 뜨겁더니 언제 그랬나 싶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차갑고 소슬하다. 저 토란 잎도 곧 누렇게 시들겠지. 그래서 저 토란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지난해, 올해 그리고 내년의 토란은 알뿌리로 이어지지만 그래도 서로 다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끝자락이 슬쩍 보이는 듯도 하다.
성철 스님은 불성을 단박에 보아버리면 더 닦을 것도 없다며 돈오돈수를 일갈하셨다. 하지만 그럴 근기를 가진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몇 번을 죽었다 깨어도 단박에 깨달을 수 없는 필부들을 헤아리셨다. ‘돈오점수, 깨닫고도 계속 닦아라. 불성을 분명히 보아버리면 남을 돕는 보살행원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건 틀린 말이다.’
단박의 깨달음과 남을 돕는 보살행원 중 어느 게 더 현실적인 가르침일까. 며칠 전 영국 사람이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상을 받았다. 그의 법명은 로카미트라, 모든 사람의 친구란 뜻이다. 인도에서 30년 동안 최하층 천민들과 함께했다. 간디와 동시대를 산 암베드카르가 그 길을 먼저 걸었다. 그는 수백만명의 천민들을 해방시키려고 불교로 개종시켰다. 간디가 비폭력저항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쳤지만 정작 수억 하층민을 내리누르는 계급제도에 대해서는 비판한 적이 없다. 보통 사람들이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친구’ 로카미트라는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깨달음이냐 남을 돕는 보살이냐를 고민하는 불교는 그래도 평화롭다. ‘방송과 인터넷과 신문을 점령하고 있는 원수 마귀를 쫓아내자’는 일부 기독교의 주장에 이르면 종교가 과연 무엇 때문에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가 2008년 8월 이 땅에 오셨다면 어떠셨을까. 방송을 점령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시청앞 광장이며 교회를 찾아가셨을까. 수천, 수만명이 매주일 교회에 모여 마귀를 향한 전투를 다짐하는 건 생각만 해도 무섭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생각난다.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대심문관은 매일 수백명의 이단자들을 처형하느라 아흔살 노구에 쉴 틈이 없다. 그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앞에 나타난 예수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유스런 판단이나 사랑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할 신비요 … 나는 내일 당신을 화형에 처할 것이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같이 가 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스승의 가르침은 듣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믿음이 다르다고 화형에 처하는 중세의 기독교는 더이상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세상은 돌고 돈다. 어제 일어난 일이 오늘 다시 일어나고 내일 또다시 일어날 게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고, 이승만 동상을 세우고, 인터넷에서 ‘마귀’들을 잡아 감옥에 보내며 그들의 일을 마저하고 있다. 그러니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고 남을 돕는 보살행원의 이타행을 했던 이들도 계속 그 일을 마저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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