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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07 20:06 수정 : 2009.01.07 20:06

김형태 변호사

김형태칼럼

돌산도 향일암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벌써 봄빛이다. 아스라이 수평선이 둥글게 둘러쳐져 있고, 멀리 점 같은 배 두 척이 물꼬리를 끌며 교차한다. 동백숲은 싱그러운 초록이고 군데군데 붉은 꽃도 피었다. 동백의 붉은빛은 어쩐지 촌스럽다. 그래서 멋지다. 장미의 빨간색이 고상해 보인다면 동백이 그런 건 아마 꽃 한가운데 있는 샛노란 수술과 대비되어서일까. 동백을 바라보는 ‘나’ 따로 있고, 그 대상인 ‘동백’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묶여 기대어 있다는 연기론(緣起論)이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생각도 아니지 싶다. 동백숲 사이를 날아다니며 꽃을 먹이 삼는 동박새에게 저 붉은빛은 마치 내 눈에 삼겹살처럼 비춰질 테니 그렇다. 이미자에게는 육지로 떠나간 무정한 님을 애타게 그리다 빨갛게 멍이 든 게 동백꽃이지만, 조용필에게 꽃피는 동백섬을 두고 떠난 ‘형제’는 누구일까.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형제’란 건 어째 좀 뜬금없다. 그리고 송창식에 이르면 동백은 선운사 부는 바람에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꽃이다. 향일암 내려오는 길에는 무에가 그리 좋은지 아까 올라갈 때부터 앉아 있던 처녀 총각이 여전히 쌜쭉이다 때리다 시시덕거리고 있다. 즐거움은 여기까지다.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와 계단 위에 쌓인 신문들을 펼치니 포스트모더니즘, 탈근대는커녕 ‘근대’도 아직 멀었다. 온 나라를 공사판으로, 신문 방송을 재벌 품으로, 나하고 다른 생각 하는 녀석들은 모조리 감옥으로. 방송 뉴스며 신문 지면은 온통 자기주장과 돈의 전쟁판이다. 날마다 이런 걸 보고 들으며 살아야 하는 우리 자신이 불쌍하다.

근대니 탈근대니 어렵게들 이야기하지만, 이성, 더 쉬운 말로 상식이 통하는 게 근대다. 어떤 이가 텔레비전에 나와 재벌 이익을 대변하는 법들을 가지고 서민들을 위한 민생법안이라며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고 우긴다.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눈 씻고 다시 보니 전경련 임원이란다. 말이 되는 이야기 좀 하라고 목소리 안 높일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또 엄숙해지고 도덕군자가 되고 세상은 재미없어진다. 한가하게 향일암이며 선운사의, 이미자의 동백꽃 어쩌고 할 여유가 없다.

지난 세월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에서 세상이 좀더 공평하고 이성적이길 그리는 소설이며 시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요즈음 거기 실린 젊은이들의 글들을 보면 흘러간 ‘근대’들은 좀 혼란스럽다. 저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상식이 통하는 민주주의에 길들여진 세대다. ‘이 시의 의미는 무얼까. 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 이 젊은 세대들은 의미를 넘어선 이들이지.’ 도덕과 의미를 넘어선 이들에게 요즈음의 전근대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여러 해 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사랑을 받았다. 그땐 정말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밥과 민주주의에 배불러지고 나니 딴생각이 들었다. 꽃은 꽃이고 사람은 사람인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놓고 사람과 꽃을 비교하는 게 적절한 걸까. 누가 누구보다 아름다우니, 도덕적이니 비교하지 말고 그저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게 어떨까.

이제 시곗바늘이 비이성, 몰상식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비분강개와 도덕군자의 재미없는 시절이 또다시 시작된 거다. 하지만 인간 세상이 이성적이건, 말이 안 되게 돌아가건, 저 남쪽바다 향일암엔 촌스럽게 빨간 동백꽃이 핀다.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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