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2.04 22:05
수정 : 2009.02.0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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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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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칼럼
아마 지금쯤 구치소 사형수 사동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을 게다. 엊그제 한 사형수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제 겨우 밥값을 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언제 저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셔도 좋고 이렇게 살아서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순간도 행복합니다.”
얼마 전 행형법이 개정되어 사형수들도 노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일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절히 느낀다. 그간 노역은 기결수들만 하게 되어 있었다. 사형수에게 기결이란 형 집행을 뜻하니 미결인 그들은 노동을 할 수가 없었다. “저런 살인마에게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밥을 먹이느냐”는 비난이 사형수들에겐 죽이라는 말 못지 않게 괴로웠을 거다. 이제 제 노동으로 제 밥값을 하게 되었다고 즐거워하던 수인에게 엊그제 강아무개씨의 끔찍한 범행은 또다시 자신의 괴로운 과거를 돌이키게 할 것이다.
잊을 만하면 주기적으로 강력사건이 터지고 그때마다 많은 이들이 저들을 사형시키라 아우성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같은 영화가 나오면 사형 찬성은 50%대로 떨어지고 연쇄살인 사건이 나면 60% 후반대로 오른다. 사형집행을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 중에는 인과응보라는 본능적 정의감이 있다. 하지만 이웃이나 세상과의 소통, 선의, 용서보다는 미움의 단죄에 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죽이라고 외치는 이들이 사형수들 못지 않게 증오심에 가득 차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형법은 악한 사람을 처벌하는 인격책임론이 아니라 악한 행동을 처벌하는 행위 책임론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거다. 누구도 강씨 같은 악인을 보면 당연히 엄한 처벌을 원한다. 그런데 우리 헌법 제10조와 35조에는 이리 써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여기 모든 국민에는 착한 이며 못된 이, 불에 타 숨진 용산 철거민, 신속 강경진압을 명령한 경찰관, 용역, 도둑, 성직자, 모두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저 짐승 같은 강모씨며 내게 편지보내 밥값을 하게 되어 기쁘다던 이도 들어간다.
강모씨 같은 이들을 사이코패스라 부른다. 그들은 뇌를 구성하는 변연계가 발달되지 않아 감정이 없다. 그러니 타인의 괴로움을 아랑곳 않고 악어나 뱀처럼 생존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이런 이들에게 인격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있다고 헌법에 써 있으니 어쩌랴. 사형과 범죄억제 기능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유엔을 비롯해 세계 여러나라 연구결과에서 밝혀졌다.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전인구의 1%가량 된단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이들은 영원히 우리 곁에 있다.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지 않고 보호하여 악성이 가능하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길밖에 없다. 뇌과학자 라마찬드라는 “신(GOD) 절제술”이란 재미있는 말을 했다. 명상이나 신과의 합일 같은 종교적 경험은 뇌 측두엽 부근에서 일어난다. 측두엽을 떼어내면 신을 절제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다. 어찌보면 사이코패스나 성인(聖人)이나 뇌의 장난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우리나라도 십년간 사형집행을 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가 되었다. 사형 폐지에 관한 한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가장 앞서 있다. 사형집행이 일년에 수천명씩 되는 중국 같은 나라에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을 비롯한 세계 대다수 국가들이 사형만은 안 된다고 했다. 흉악범이 고와서 살리자는 게 아니다. 범죄는 처벌하되 사람은 죽이지 말아야 모든 이들이 이웃을 존중하게 될 게다. 죽이는 것만은 안 된다.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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