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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15 21:47 수정 : 2009.04.15 21:47

김형태 변호사

김형태칼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보도에 많은 이들이 절망했다. “팔레스타인 1300인, 그들은 전사하지 않고 학살당했다”는 안상학의 시. 거기에는 “절망한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절망. 이마에 총 맞은 팔레스타인 소년의 주검”이란 대목이 있다. 끝 모를 절망의 끝을 이렇게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절망”이라 외쳤다. 하지만 언제는 안 그랬으며 또 언제는 안 그럴 것인가. 만 년 전에도 만 년 후에도 인간은 인간을 죽이고 배신할 테니 새삼 절망할 일도 아니다.

북한의 로켓 발사도 그렇다. 그것이 인공위성이라는 게 미국과 남한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백 보를 양보해 미사일 실험이라도 마찬가지다. 이미 엄청난 양의 핵탄두미사일을 보유한 나라들이 여럿이요, 일본이 플루토늄을 재처리하고 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의 감축이나 폐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이제 겨우 아기 걸음마에 불과한 북한만을 두고 안보리 성명까지 나왔다. 로마시대나 지금이나 조폭들의 세상일 뿐이다. 그래도 팔레스타인이며 북한에는 꽃이 피고 아이들이 태어날 테니 절망의 끝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답지 않다.

세월이 하 수상하니 신문 접고, 텔레비전 끄고 시조나 한 수. “내 가슴에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 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님 생각 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부안 기생 매창의 가슴에 피 흐르게 하는 저 님은 누구인가. 노래에는 찬바람이 인다. 찬 바람 휙휙 불기로는 설악산 울산바위도 한자리한다. 지난 춘삼월 바위를 오르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찬지 철 난간 붙잡고 오도 가도 못했다. 매창의 가슴에 부는 바람은 손에 잡을 수도 없으되 울산바위 부는 저 바람은 실체가 있는 걸까. 인도의 변증론자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바람이 분다”는 명제는 동어반복이다. 바람이란 실체가 어디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울산바위로 불어오는 게 아니다. 어디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바람이란 없다. 가만히 있는 건 바람이 아니다. 기압 차이가 나면 비로소 시작되는 게 바람이니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느껴지는 바람의 존재가 이럴진대 세상일에 대한 판단은 더더욱 어렵다. 작년에 남부지방법원은 다우너 소는 광우병 위험성이 크다는 ‘피디수첩’ 보도는 허위라고 판단했다. 크다, 작다는 판단의 기준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근거로 허위라는 것인지 중학교 수학도 안 배웠나 보다. 종교인, 판검사들은 교리나 법조문 가지고 세상일을 흑백 둘로 나눈다. 착하게 살면 천당에 간다지만 그 기준 역시 모호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 년을 싸웠는데 어느 편이 선인지는 아마 신도 모르실 게다. 유순한 성격은 개인적으로 선하다 할 수 있지만 결단이 필요한 정치인에게는 우유부단의 악이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할 때도, 악한 일을 할 때도 있는데 염라대왕은 선업과 악업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저울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판검사도 마찬가지다. 상대방과 거래를 하다가 제대로 이행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처음부터 이행할 의사와 능력이 없었다면 형사상 사기죄다. 하지만 처음부터 의사 능력이 전혀 없는 이들은 별로 없을 테니 형사 사기죄와 민사 채무불이행은 경계가 모호하다. 뇌물죄나 알선수재죄도 대가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늘 다툼이 있다. 따라서 정치인치고 여기서 자유로울 이는 별로 없다.

법이나 종교에서 시비 판단은 그 존재 이유다. 그러나 종교인이나 법조인들이 꼭 새겨둘 명제 하나.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총천연색이다.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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