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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08 21:21 수정 : 2009.06.08 22:03

김형태 변호사

나이가 들수록 나이 든 사람이 싫어진다는 말은 진실이지 싶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7080가수들을 보면 안쓰럽고 그만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내일모레 팔순인 노모는 마당에 꽃이 시들면 바로 뽑아버린다. 봉숭아 열매가 여물어 터질 새가 없으니 해마다 봄이면 씨를 새로 사다 심는다. 오늘 아침에도 시든 엉겅퀴를 뽑으며 아들 눈치를 본다. 세상에 가장 가까운 게 모자지간이라지만 마당에 시든 꽃 하나 뽑는 걸 가지고도 생각이 다르다.

하물며 남남끼리야 오죽하랴 싶지만 그래도 지나치다. 엊그제 시인 황지우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명박 정부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그냥 두질 않는다. 이 학교가 예술 쪽 좌파들의 근거지라고 생각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몇몇 교수들을 지목하고 이론과정도 대폭 줄이거나 아예 없애고 싶어한다. 예술을 이념적 좌우라는 기준만으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기막히다.

예술도 소재를 현실에서 얻으니 현실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른 것은 분명할 터. 하지만 예술은 소재를 넘어서서 이를 ‘미’라는 보편적 감정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바그너의 곡들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한 미군 전쟁광이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발퀴레’를 틀어놓고 무차별 융단폭격을 한다. 음악사가들은 바그너의 음악이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복무했다고 평한다. 하지만 히틀러를 떠올리지 않고도 바그너는 바그너다. <수제천>은 조선왕조의 장엄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데 반해, 판소리 <심청가>의 ‘심봉사 눈뜨는 대목’은 필부필부들의 심금을 울린다. 시와 노래, 춤, 그림이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특정 계층의 이념을 대변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래도 <수제천>이며 <심청가>는 신분과 처한 상황을 떠나 모든 이들의 가슴에 와닿는다.

황지우는 이런 시를 썼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에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시인은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자신을 어색해하고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자신의 삶을 그만 허물어 버리고 싶어한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의 버거움과 혼돈을 아는 시인에게 그저 한마디로 ‘좌파’라고 딱지를 붙이는 건 절망스러운 일이다.

그가 총장으로 있는 동안 예술과 철학 그리고 기술을 통섭하는 교육과정을 설치한 것은 세계적 사조에도 맞는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을 무시하고 오히려 학교의 예술이론과를 없애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렇다. 이 학교 설치령에서는 분명히 “예술 실기 및 예술 이론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대학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론교육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배제하려는 건 예술을 정치의 시녀로 만드는 일이다. 이론의 뒷받침 없이 좋은 실기가 나올 수 없다. 원근법이 나오기 전 그림들을 보면 보잘것없어 보인다. 원근법 이론은 서양미술을 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 “말 많으면 공산당”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본래 사람은 말 가지고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 말이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거다. 이 학교에서 이론을 배제하겠다는 건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황지우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보는 자신을 ‘아름다운 폐인’이라 했다. 그리고 시를 이렇게 맺었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우리에겐 바그너도 황지우도 모두 소중하다.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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