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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31 21:11 수정 : 2009.08.31 21:11

김형태 변호사

처가 여름 뒤끝에 며칠 몸살을 앓았다. 처음에는 기침이 나고 목이 붓더니 엊그제는 열도 났다. 병원에 간다는 걸 겁을 주어 말렸다. “괜히 병원에 가면 붙들려서 갇힌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 플루인지 확인하는 데만 15만원이 든단다. 다행히 하룻밤을 자고 나니 열도 내리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신종 플루로 전세계가 난리법석이다. 세계적으로 수천 명, 우리나라에서 세 사람이 죽었다. 매일 저녁 뉴스 시간에 어느 나라에서 새로 몇 명이 죽었다고 실황 중계를 한다. 너나없이 두렵다. 하지만 신종 플루는 중세유럽을 폐허로 만든 페스트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되고 그저 좀 강한 독감 수준으로 보인다.

전세계적으로 가난 때문에 매일 2만5000명이 굶어죽고 우리나라에서만 하루 30여명이 자살하는 현실은 신종 플루보다 수천, 수만 배 더 끔찍하다. 그래도 가난이나 자살은 나와 직접 상관이 없지만 신종 플루는 내 코앞에 닥친 구체적 위험이기에 관심의 정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사실 한두 세대 전만 해도 병이나 죽음은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페니실린이나 예방주사를 발견한 이래 급격히 발달한 의학과 기술 덕분에 병과 죽음은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 ‘자연스럽다’는 말뜻이 바뀌었다. 옛날에는 맹장염에 걸리면 죽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이제는 외과 수술과 항생제 투여는 너무도 당연한,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런 처치를 안 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생명 연장 치료를 과연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인류의 수는 정착생활을 시작한 기원전 만년 무렵 4000만, 기원 전후 1억1500만, 19세기에 10억, 현재는 약 60억명으로 추산된다. 모두가 과학·기술 덕이다.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엄청난 양의 곡물을 거둘 수 있고, 생명체인 소·돼지를 공정화된 시스템으로 공산품처럼 사육·가공해 낸다. 요즈음 아이들에게 닭은 따스한 봄날 병아리 떼 몰고 다니는 생명이 아니라 그저 튀겨진 고깃덩이일 뿐. 이명박 정부는 동물 학대 동영상을 왜 광우병 보도에 이용했느냐고 피디들을 재판에 넘겼다. 소에게 소고기를 먹이는 건 사람에게 사람을 먹이는 것과 같다. 동물 학대의 업보로 광우병의 공포가 인간 세상을 덮쳤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 한심하다.

과학·기술은 풍요와 안전의 환상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도 가르쳤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풍요와 안전이라는 잿밥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인간 ‘나’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과학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저 들판의 곡식이나 사육장의 소·돼지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과학·기술 덕에 내가 오래 살면 살수록 지구는 만원이 되어 내 후손이 살 장소며 먹을거리, 자원이 없어지니 후대의 것을 빼앗아 먹는 격이다. 독일의 현대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 ‘희망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책임의 원리’를 내세웠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책임’. 지금까지의 윤리학이 인간 중심이라면 앞으로는 동물과 식물, 생물 서식권으로서의 전체 자연의 보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의 범위도 나와 가까운 ‘주변’과 ‘현재’만이 아니라 ‘저 멀리’ 그리고 ‘미래’까지 책임지라는 것이다.

내 처가 비교적 가벼운 질병의 공포 때문에 들이는 15만원의 신종 플루 검사비를 당장 굶어 죽어 가는 아프리카 아이에게 돌리고, 내가 적당히 늙으면 독감에 걸려 죽어 주는 게 ‘가장 멀리 있는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도리다.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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