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26 22:08
수정 : 2009.10.2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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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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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연이 있겠지.” 오래전 이런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임이 떠난 낙엽 쌓인 거리에서 누군가 밤새 흐느끼고 있다. 저 사람은 필경 무슨 사연이 있을 게다. 아주 성격이 급한 노신부가 계셨다. 미사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복을 훌렁 벗어 둘둘 말아 제단에 놓고는 쏜살같이 마당에 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분은 운전을 하고 가다가 갑자기 앞차가 끼어들면 성격상 바로 육두문자가 나올 법한 순간에 유행가를 불렀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이와는 달리 나이가 들수록 점점 고집만 늘어 사사건건 심하게 다투는 부부들도 있다. 엊그제 한 진보단체 출범식에는 여든여섯이나 된 노인이 주최 쪽을 향해 ‘빨갱이들’이라고 욕을 하면서 뛰어들어 행사를 망쳤다. 오십년 전 ‘땃벌단’ 청년이 이제 노인이 되어 다시 나타난 건가.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나이란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한 달 월급을 몽땅 털어 명품 가방을 사는 이십대를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아이고, 저런 얼빠진 녀석들” 소리가 절로 났다. 요즘은 다른 생각이 든다. 어디 세상에 잘난 이들만 자존심이 있겠는가. 유명 가수나 탤런트처럼 예쁘지도 않고, 돈도 없고, 집안도 별 볼 일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제 잘난 맛에 산다. 그러니 하다못해 명품 가방이라도 들고 다니면서 자신의 존재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건 어찌 보면 ‘존재’의 당연한 속성이다. 이해가 간다. 다만 여러 스승들은 권력, 명예, 돈, 또는 이도저도 없는 이들의 명품 가방 같은 슬픈 자존심이 세상과 나에게 평안을 가져다주는 해법은 아니라셨다. 사실 명품 가방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이들은 그 돈 대느라 삶이 쪼들려서 그렇지 남에게 별로 큰 해는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잘난 이들의 자존심이 세상을 더 어지럽힌다. 맨 위에는 정치와 종교가 있다. 자신만이 세상을 편히 하고, 구원한다는 생각은 그들에 능력이 못 미치거나 다른 생각을 가진 주변 사람들을 크게 괴롭힌다. 하긴 플라톤 같은 지혜로운 분들도 평생 정치의 꿈을 못 버렸다. 공자도 나이 오십에 노나라 법무장관 격인 대사구가 되었다. 플라톤은 이렇게 썼다. “나는 젊은 시절보다 훨씬 느긋하기는 했지만 정치에 관여하고 싶다는 욕망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는) 정권을 잡은 자들과 법률, 관습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나이가 들수록 이 모든 제도의 구조를 더욱 분명히 꿰뚫어보게 되어 정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확실히 깨치게 되었습니다.” 그 뒤가 좀 그렇다. “정의롭고 진실한 철학자가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하거나 국가의 권력자가 신의 섭리를 받아들여 참된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인류의 불행은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견해가 저마다 다른 게 이 세상 불행의 근본이다. 탈레반과 부시 전 미국 대통령, 4대강 개발이 생명을 죽인다는 이들과 돈을 벌어들인다는 현 정권은 ‘정의’를 보는 관점이 하늘땅 차이다.
그저, 정치란 정의나 진실을 구현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생각들과 이해관계를 잘 조화시키는 기술 정도로 여기면 세상이 좀 평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머리 좋고 예쁘고 부자고 해탈의 경지를 넘나드는 반야의 지혜를 가진 이들만이 아니라 별로 내세울 게 없어 명품에 목숨 거는 불쌍한 ‘중생’들의 처지와 생각도 헤아려줄 줄 아는 게 정치이지 싶다. 부디, 나 아닌 남도 잘할 수 있다는 겸양지덕을 안산 재선거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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