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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18) 절정을 아끼다
산정에 날름 터잡고 앉은 정자이웃과 상관없이 불손한 집들…
고요한 산굽이와 강물의 흐름
비워두고 그냥두면 좋으련만…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다 보면 대전 조금 못 미쳐서 오른쪽에 주위의 산과는 조금 격이 다른 산줄기가 하나 있습니다.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은 산인데, 바위산입니다. 산 능선을 따라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보이지요. 그런데 그 아기자기한 여러 개의 봉우리 중 한 봉우리 꼭대기 위에 날름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 정자는 건방지고 오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입니다. 본래 산의 모양을 변화시켜버린 정자를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화가 납니다. 그런 정자들이 이 나라 산꼭대기 곳곳에 새끼에 새끼를 치고 있습니다. 섬진강을 따라가다 보면 옥과에 금호타이어 공장이 있습니다. 금호타이어 공장을 지나 조금만 가면 옥과면 입면이 나오는데, 섬진강이 직선으로 달려가는 곳에 정면으로 산이 하나 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산을 향해 달려가다가 강물은 그 산과 마주치며 굽이를 살짝 틉니다. 물이 들이받는, 산이 뚝 떨어진 날 등 끝을 비껴 정자가 하나 가만히 숨어 있습니다. 정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정자는 산의 정상에 우뚝 지어진 정자가 아닙니다. 달려오는 강물을 다 보고 옥과 들을 다 보려면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야 아름다운 풍광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요. 옛날 어른들은 그렇게 정상은 비워두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산천의 절정을 아껴두었지요. 돈 있는 사람들이 새로 개발한 산골 주택지에 지어 놓은 전원주택이나 별장들을 보면 참으로 가관입니다. 전원주택이나 별장 지역 터들은 대개 풍광이 그럴듯한 곳들인데, 그곳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도록 욕심껏 집들을 짓지요. 주택도 그렇고 카페나 찻집들도, 어떻게 하면 한눈에 그곳의 모든 풍경을 다 보게 지을까 고심들을 한 흔적이 역력하지요. 아름다운 경치는 이따금 보아야 아름다운 법입니다. 단 한번에 그곳의 풍경들을 다 보아버리면 다음에는 무엇을 보러 오고 갑니까. 아무리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지요. 기대했던 사람도 한번 만나서 그 사람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아버리면 힘이 팽기지요. 사람이나 풍경이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와야지요. 아름다운 곳은 숨겨두고 찾아가는 수고 뒤에, 또는 우연히 눈에 들어와야 새롭고 아름다운 법입니다. 도시 근교 농촌 마을을 지나다 보면 가난하고 누추한 마을 복판이나 마을 주위에 눈에 확 뜨이는 커다란 서양식 집들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게 누구 집이냐고 하면 대개가 교수 또는 의사 또는 화가 집이라고 합니다. 마을의 헌집을 사서 부수고 그곳에 그렇게 커다란 집을 지어 놓지요. 그런 집들이 그 마을의 집들과 그 마을 산천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허물어지는 빈집들과 누추한 집들을 무시한 그 불손함이 극에 달해 보이지요. 도대체 양식이 있는 사람의 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터무니없이 큰 집들은 그 마을과 그 산천의 균형을 깨트려버립니다. 왜 우리나라 속담에 ‘꾀벗고 돈 닷 돈 찬다’는 말이 있잖아요. 마치 그 형상입니다. 내 집이 이웃집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동네나 산속에 있는 듯 없는 듯 숨겨두어야지요. 집은 산천 속에 스며들어 있어야 합니다. 조화로움이란 자연을 잘 읽어내는 일이지요. 지나가다가 ‘그래 아까 어떤 집이 있는 것 같았지?’ 하고 뒤돌아 보아서 그 집이 보여야지요. 그게 집입니다. 집은 낮을수록 좋지요. 우리 어머니는 서울의 높은 집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따, 겁나게 높다인-.” ‘겁이 나는 집’들이 우리들의 산과 들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어느 날 메일이 왔는데, 그 친구가 시골 마을에 헌집을 한 채 샀답니다. 집을 수리하고 도색을 다시 해야 하는데, 집에 무슨 색을 칠해야 할까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했답니다. 그런데 한 달이 넘도록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나라 산천의 집과 도로와 빌딩과 아파트와 곳곳의 국적도 뭣도 없는 음식점들과 모텔들을 생각했답니다. 자기 집과 주위의 집에 대해 적어도 그 정도는 걱정들을 해야지요. 스위스를 다니다가 어떤 마을에 내렸습니다. 그림엽서 같은 초원 위의 집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높은 산 위에 있는 집을 향해 노란 승용차 한 대가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승용차는 마치 풀밭을 헤치고 가는 것처럼 보였지요. 예뻤습니다. 그런데 차가 산을 타고 오르는데,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을 숨긴 것이지요. 산 위에 있는 그림 같은 집으로 올라가고 있는 차는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마티즈’였습니다. 차도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그 품격이 살아나기도 하고, 그 모양이 형편없이 구겨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길은 있으나 길이 보이지 않는, 자연 앞에서 인간들의 겸손함이 묻어나는 길과 집들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저 저만 생각하는 졸렬함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조잡하고 성질 급한 축조물들과 건축물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다 망가뜨려가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오만이지요. 탐욕이 산꼭대기까지 치고 올라갑니다. 얼마 전에 안동 하회마을에 가보았습니다. 다 알다시피 하회마을처럼 아름다운 마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놀랐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식점 간판들이 그 오래된 마을의 풍경을 다 망가뜨려놓고 있었지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모양 없고, 그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간판들이 그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무엇 합니까. 입만 아프고 좋은 말 귀양만 보내는 꼴이지요. 농촌 마을을 지나다가 보면 들 가운데나 마을 앞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보게 됩니다. 마을 앞과 뒤, 마을과 마을의 경계, 또는 들 가운데에 있는 그런 큰 나무들은 오랜 세월 동네 사람들의 정성으로 가꾸어진 나무들이지요. 사람들이 집 문을 열고 나설 때 동네 앞이 너무 휑하게 비어 있으면 어쩐지 불안을 느끼게 되지요. 텅 빈 공간을 향한 불안한 시선을 한곳으로 자연스럽게 모아 마을과 들의 중심을 잡아주고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아주는 이 나무들은 조상들의 슬기로운 생활과 지혜가 담긴 나무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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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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