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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29 18:39 수정 : 2008.09.29 18:39

김용택의 강가에서
(20) 깊어지는 가을에 읽는 봄에 쓴 시 세 편

털린 벼들이 마을 길에 노랗게 널리기 시작합니다. 해 지면 먼 마을로 가는 들판에 산그늘이 내리고 벼들이 샛노랗습니다. 우리나라 가을 산그늘처럼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들어 가라앉히는 그늘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올해는 여름이 길어 햇살이 넉넉했습니다. 넉넉해진 햇살 때문인지 들판에 벼들이 어느 해보다 마음껏 익어가며 샛노랗습니다. 어떻든 벼 익어가는 들판은 넉넉해 보입니다. 들판을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와 앉으니 샛노란 벼들이 내 책상 위로 따라 들어옵니다. 문득 지난봄에 써 놓은 시가 읽고 싶어집니다. 세상에 시가 읽고 싶어지다니, 마음이 가을비 맞은 산천처럼 촉촉하게 젖어 옵니다. 시 세 편을 골랐습니다.

서울에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돌아온 아이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시든 풀잎이 되어 아이들은 시골로 돌아오지요. 오랜 세월 양극화의 한쪽 끝으로 끝없이 밀리고 밀려온 농촌…. 그리고 다시 그 아들들의 손자들이 양극화의 한쪽 끝 벼랑으로 밀려오는 것이지요. 체에다가 잔자갈이 섞인 흙을 담아 흔들면 체 구멍으로는 흙들이 새어나가고 큰 자갈들만 남지요. 요즘 자꾸 체 구멍이 커지고 자갈들이 체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1톤 트럭을 몰고 도시의 골목길을 헤맬 아이들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시가 <사랑>입니다. 나머지 두 편은 시골로 보내진 우리나라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을 떠나온 지 한 달, 불쑥불쑥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곤 합니다. 시인

사랑

어둠이 몰려오는

도시의 작은 골목길 1톤 트럭 잡화장수


챙이 낡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전봇대 밑 맨땅을 발로 툭툭 찬다.

돌아갈 집이나 있는지.

한시도 사랑을 놓지 말자.

세희

꽃 떨어지고 새잎 난다. 아이들이 날리는 저기 꽃잎을 따르고

세희가 달려와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고 작은 손,

가난은 배고픈 봄날처럼 길고 멀다.

빈손으로 고향을 떠난 지 20년,

아내는 떠나고, 남겨진 어린 두 딸을 버린 고향에다가 버린다.

마을 앞 솔밭 솔잎은 푸르고, 빈 논에 네 잎 자운영은 돋는다.

시린 새벽, 잠든 너희들을 깨워 데리고 서울을 빠져나와

잠든 너희들을 두고 고향 마을을 빠져나간다. 솔바람 소리 따라다니던 내 청춘의 강굽이들,

내 어찌 눈물을 감추랴. 한 점 꽃잎처럼 살아 있던 우리 집 불빛이 진다. 아! 어머니, 강물에 떨어지는 불빛은 뜨거운 내 눈물입니다. 아버지의 가난은 때로 아름다웠으나, 나의 가난은 용서받은 곳이 없습니다.

무너진 고향의 언덕들, 어디다가 서러운 이내 몸을 비비랴.

흐린 길이다. 어스름 새벽, 아내와 아이들이 없는 서울 길을 달릴,

아, 초행길처럼 서울은 낯설고 멀기만 하리라. 몽당연필에 침을 발라 표지가 너덜거리는 공책에 글씨를 쓰던 남루한 네 모습을 내 어찌 지우겠느냐. 이 슬픔과 부끄러움, 이 비통함과 분노가 내 일생이다.

세희의 손을 꼬옥 쥔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아이의 손은 어찌 이리 작고도 따사로운가.

꽃잎들이 맨땅을 굴러간다.

세희가 내 손을 놓고

꽃잎을 따라간다. 나는 날마다 꽃잎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환생을 꿈꾼다.

세희의 온기가 남은 내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온기가, 남은 온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세희야 날아와!

세희야 날아와!

이리 날아오라는, 말이 안 나온다. 꽃 지고 새잎 나는 봄, 어둠 속에 떨어진 나무 가지 같이 기가 막힌 나의

손.

손톱

너무 길어서 깨지고 금간 세희의 손톱을 깎는다.

동네 맨 끝 꼭대기에 사는 세희 아버지는 유난히 까만 얼굴이었다.

깎아도, 깎아도 길어나는 손톱처럼

가난은 잘라지지 않는다.

세희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눈이 어두우니

손톱이 길어나면 나더러 깎아달라고 해 알았지?

가는 손가락 끝에서 희게 금이 간 긴 손톱을 자를 때마다

손톱들이 톡톡 튄다.

일요일이 되어도 세희의 일기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감자밭에 가서 난생처음 감자를 캐고,

손톱 사이에 흙이 끼리라. 아가야, 너는 내게 낯설고, 나는 네 살이 어디서 만져 본 듯하구나.

꾀꼬리가 날아간다.

밤이면, 까만 밤이면

눈을 뜨고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세희는 잠을 설친다.

무슨 일인가.

김용택 시인
밤에 새가 울다니, 때로 달빛이 창문으로 새어들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위를 지난다. 학교 갔다가 돌아온 반지하방 엄마는 없고 늘 어두웠다.

아버지가 살았던 몇 집 안 되는 할아버지의 마을, 텅 빈 집들은 무섭고, 산은 검고 밤은 길기만 하다.

학교에 가야지. 나처럼 서울에서 온 아이들과 점점 친해진다. 산도 작은 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 저 언덕 푸른 소나무야. 저문 날 밤꽃이 하얗게 핀다.

세희야, 네 아버지를 내가 가르쳤단다. 아버지가 그런 줄 알고 있니?

세희가 고개를 떨구며 끄덕인다.

바지 주름에 숨은 손톱들을 털어 줍는다. 흰 손톱 몇 개가 마루 틈에 끼었다.

내 손톱을 집어넣어 손톱을 빼내려 하나 손톱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세희야, 할아버지가 때워 놓은 모들이 땅속에서 하얀 뿌리로 어둠 속의 흙을 더듬는구나. 몇 개의 손톱을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허리를 편다. 푸른 산으로 꾀꼬리가 울며 솟구친다.

세희의 손톱은 어둔 밤에도

하얗게 길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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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김용택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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