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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23) 두 편의 동시와 짧은 이야기 넷
팽이 - 강희창
팽이야 빙빙 돌아라. 어지럽다고 멈추지 말아라.
팽이야 빙빙 돌아라. 멈추면 죽는다.
팽이야 돌아라. 힘차게 돌아라.
팽이야 빙빙 돌아라. 니 위에 무거운 게 떨어졌다고 멈추지 말아라.
팽이야 빙빙 돌아라. 물에 떨어져도 돌아라.
빨간 팽이, 노란 팽이, 초록 팽이 모두 돌아라.
팽이야 빙빙 돌아라. 거센 바람이 불어도 돌아라. 다은이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속 논 가에 고마리 작은 꽃송이들이 울긋불긋 아름답다. 교문에 들어섰다. 용민이, 현수, 한빈이, 강수, 은희가 안개 속에서 놀다가 나를 보더니 일제히 얼굴을 돌리며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꼭 고마리 꽃송이들 같다. 교실에 들어서니 희창이란 놈이 혼자 앉아 무엇인가 하고 있다. 들여다보았더니 일기를 쓴다. 어른이건 아이건 혼자 앉아 무엇인가 하고 있는 호젓한 모습은 예쁘다. 안개 낀 학교와 학교 둘레의 모습이 장엄하다. 그 장엄함 속 아이들 모습과 아이들 목소리는 얼마나 청량하고 신비로운가. 점심시간에 속이 불편해서 보건실에 가서 약을 먹고 나오는데, 다은이가 저쪽 복도 끝에서 나에게 달려온다. “저 밥 많이 먹었는데요.” 요사이 아이들이 밥을 너무 많이 남겨 밥 다 먹기를 지도하는 중이다. “잘했다”며 걷는데 다은이가 내 곁에서 나란히 걸으며 내 손을 잡는다. 작은 손이 따스하다. 구름 속에서 나온 햇살이 좋아 현관 밖으로 나오자 다은이도 따라 나온다. “선생님 어디 가요?” “으응, 햇빛 보러.” 다은이도 따라 나와 나랑 나란히 햇볕 앞에 섰다. “아! 햇살이 참 좋다.” 다은이가 감탄하며 하얀 운동장을 바라본다. 나와 나란히 서 있는 다은이를 보며 말했다. “다은아.” “예.” “나는 다은이가 좋아.” 그랬더니. 다은이도 그런다. “나도 선생님이 좋아요.”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 모습을 둘이 오래 보고 서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좋을 때가 있다. 서정 시인 국어 읽기 시간이다. ‘마을 회의’라는 단원이 있다. 마을길을 넓히는 일 때문에 마을 회의가 열렸다. 책의 내용을 보면 길을 넓히자는 쪽과 넓히지 말자는 쪽 의견이 팽팽하다. 아이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여덟 명 중에 일곱 명은 길을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한 명만 반대 의견을 냈다. 아이들에게 그러면 나는 어느 쪽일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여덟 명 중에 두 명은 선생님은 길을 넓히는 쪽일 거라고 했고, 여섯 명은 길을 넓히지 말자는 쪽일 거라고 했다. 아이들은 평소 나의 말이나 동네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종합해서 대답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은희에게 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은희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시인이기 때문에, 나무와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요.” 은희는 덧붙였다. “선생님 서정 시인이죠?” “누가 그러데?” “우리 어머니가요. 선생님은 농촌 서정 시인이래요.” 풀잎 같은 아이들 아침에 교문으로 올라가니 다은이가 “서생니임” 하며 비탈진 교문에서 뛰어내려 온다. 다은이 뒤엔 희창이가 있겠지? 생각하는데 과연 희창이가 교문 모퉁이를 돌아 내려오다가 나를 보자 크게 인사를 한다. 다은이가 내 손을 잡는다. 차다. 차다고 하니 다은이가 내 얼굴에 손을 댄다. 흠칫 놀랐다. 손이 오리발처럼 빨갛다. 희창이를 따라 한빈이, 종현이가 뛰어온다. 한빈이가 새 점퍼를 입고 왔는데 잘 어울리고, 풀잎처럼 모습이 산뜻하고 예쁘다. 자연에서 자란 소년이다. 종현이가 나더러 “선생님, 왜 오늘은 차 안 타고 오세요?” 한다. 걸어왔다고 하니 “우와! 멀었겠다” 하며 뛰어간다. 2학년 아이들의 몸짓은 어찌 저리도 빛나 보이는지. 사심이 없는 아이들의 몸짓은 늘 눈이 부시다. 이 세상에 사심 없이 뛰노는 아이들은 나무들같이 순수하다. 깨끗한 풀잎처럼 햇살 속을 뛰어다닌다. 운동장에 난 잔디에 서리가 하얗다. 아이들이 저 서리를 밟고 뛴다. 아니, 튄다. 이 세상 모든 사람 중에서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2학년과 같이 지냈다. 외로운 희창이 퇴근하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희창이가 학교 아래 마을에서 뛰어 올라오더니, 혼자 땅바닥에 막대기로 금을 긋고 있다. 글자도 아니고 무슨 형상도 아니다. 그저 이리저리 앞으로 뒤로 옆으로 금을 긋는다. 4시30분인데도 해가 뒷산을 넘어가고 앞산 머리에 햇살이 조금 걸렸다. “희창아, 어디 갔다 왔어?” “동네 한 바퀴 돌았어요.” “혼자?” “네.” “왜?” “그냥요.” “그냥?” “네.” “아무도 없어?” “네.” 강 건너 산마루에 걸려 있던 햇살도 넘어갔다. 바람이 분다. 운동장이 너무 커 보인다. 나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희창이가 땅바닥에 금을 긋고 있는 것을 보며 말을 건다. “희창아, 지금 혼자 뭐해?” “그냥요.” “그냥 뭐 허냐고?” “그냥요.” “그냥 뭐 허냐고?” 희창이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자꾸 운동장에 이리저리 금을 긋고 있다. “희창아, 나 간다.” “네, 안녕히 가세요.” 운동장이 너무 커서 자꾸 슬프다. 해가 넘어가버린 운동장이 너무 넓어서, 놀 사람이 없어서 땅하고 막대기하고 노는 희창이가 너무 심심해 보여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희창이가 땅에 그은 선들은 훌륭한 그림이리라. 훌륭한 친구고, 아름다운 이야기고, 빛나는 말이리라. 해가 지는 장엄한 자연 속에 희창이는 홀로 있었다. 가을바람, 나무, 하늘, 물소리, 흙, 나무막대기, 검게 일어서는 산, 어둔 하늘 별빛 아래 희창이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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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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