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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25) 진메 마을의 가을
아파트 뒷산에 상수리나무와 도토리나무가 많습니다. 어슴푸레하게 날이 새기 시작하면 산책을 나가는데, 요즘 길 가운데에 동그란 것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허리를 굽혀 주워 보면 상수리입니다. 흙먼지를 닦아 보면 땡글땡글한 것이 앙증맞기 그지없습니다. 상수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습니다. 상수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만지며 길을 걷다가 날이 훤해지면 꺼내어 봅니다. 튼실하게 익은 모습은 아닙니다. 잔주름이 보입니다. 가뭄 탓입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산책길엔 먼지들이 풀썩입니다. 걸을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 발등에 쌓입니다. 지렁이들이 죽어 있습니다. 날이 너무 가물면 지렁이들은 땅 위로 올라옵니다. 지렁이 기어간 자리라더니, 마른 흙 위에 지렁이가 기어간 자리가 확연합니다. 그 자국 끝에 지렁이들이 뽀얀 먼지를 둘러쓰고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마른땅에 습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단단한 길바닥 땅을 뚫고 올라오는 모양인데, 그게 죽음의 길이 됩니다. 참나무 잎은 겨울에도 잘 떨어지지 않는데 푸른 참나무 잎이 시들거리다가 푸른색을 띤 채 떨어져 있습니다. 마삭줄도 개나리도 길가에 여뀌 풀도 싸리나무도 시들거리며 몸이 배배 꼬이며 말라갑니다.
가을 가뭄에 지친 강물은내 어머니 몸처럼 보트고 오늘은 시골에 갔습니다. 운암교를 지나는데 섬진강 댐 물이 훌쩍 줄어들어 있습니다. 댐 속에 수몰되었던 논과 마을과 마을로 가는 다리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댐에 물이 마르면 왠지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노릇이 가뭄입니다. 누가 저 너른 공간에 물을 채웁니까. 마을에 들어서니 강물도 쑥 빠졌습니다. 강물 속에 감추어져 있던 물때 묻은 돌들이 하얗게 드러났습니다. 어머니 몸같이 밭고 말라가는 강물을 보면 가슴이 조여듭니다. 바위가 많은 앞산과 옆산의 나무들이 짙은 갈색으로 타들어갑니다. 동네에 있는 복두네 샘과 우리 뒷집 샘도 말라갑니다. 두 집 샘에 물이 마르는 것은 정말 오래 가물다는 뜻이지요. 옛날에 동네 샘물이 마르면 앞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었지요. 물동이에 물을 길어 이고 강에서 마을로 걸어오는 모습은 짙은 서정이었지요. 지금은 마을 뒷산에 만든 상수도에서 물을 가져옵니다. 집 앞에 있는 한수 형님네(참, 한수 형님이 아직도 병원에 계십니다), 태환이 형님네, 동환이 아저씨네, 만조 형님네, 종만이 아저씨네, 승권이네 벼들은 다 베었습니다. 담배 집 앞에 있는 이장네 논의 벼들만 따가운 햇살 속에 샛노랗게 서 있습니다. 내일 모레 비가 온다고 해서 아직 베지 않았답니다. 정자나무 밑에 한수 형님네 산두(밭벼)도, 회관 옆 밭에 있는 성민이네 산두도 다 베었습니다.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고 난 깨도, 보리타작하는 도리깨 소리를 듣고 난 토란도 고추도 콩도 팥도 이미 다 추수를 끝냈습니다. 동네 앞에는 이제 배추와 무만 싱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가을 들판의 푸른 배추밭과 무밭을 좋아합니다. 모든 곡식들이 다 떠나간 빈 들판에 싱싱하게 푸른색을 띤 배추와 무는 가을 들녘의 생명력을 확인시켜줍니다. 무밭을 지나다 무들이 하얗게 땅 위로 솟아 있는 것을 보면 내 몸이 불끈하지요. 어느 해 나는 텅 빈 11월의 빈들을 걸어 퇴근하고 있었습니다. 가을 산그늘이 강물에 가 닿는데 그 산그늘이 지나가는 들 끝 푸른 배추밭에서 웬 여자가 엎드려 배추를 뽑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배추를 뽑던 여자는 배추를 소쿠리에 담아 머리에 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들을 질러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머리에 인 푸른 배추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월남치마를 입은 그 여자는 논두렁길을 걷지 않고 빈 논을 질러오고 있었지요.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마을 앞 강 길에는 벼들이 누렇게 널려 있습니다. 가을이 길고 햇살이 좋아서 올해는 벼 작황이 좋았습니다. 회관 마당 구석과 정자에는 벼 가마니들이 길고 높게 쌓여 있습니다. 마을 안길에는 콩 타작을 한 검정콩, 녹두콩, 메주콩이 널려 있습니다. 가물었는데도 콩들이 실하게 잘 여물었습니다. 회관 앞마당에 어머니들 넷이 이마를 마주대고 둘러앉아 무슨 일인가 합니다. 가까이 가 보니, 빨간팥입니다. 팥을 둘러싸고 앉아 벌레 먹은 팥을 가립니다. 이게 누구네 것이냐고 물으니, 택수네 것이라고 합니다. 택수네 것인데 택수 아버지도 택수 어머니도 보이지 않습니다. 택수 어머니는 회관 앞밭에서 혼자 깻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뜨거운 햇볕 속에서 일을 하냐고 하며 회관 그늘로 팥이 널린 비닐 덕석을 끌어 옮겼습니다. 팥이 붉기도 합니다. 요즘은 콩밭에도 깨밭에도 농약을 해야 합니다. 농약을 안 한 곡식은 이제 고구마뿐이고 과일은 앞산 토종 감뿐입니다. 불쑥 솟은 무와 배추들은
마지막 푸르름을 뿜는데 팥을 고르다가 점심때가 되었다고 성민이 할머니가 국수를 삶는답니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회관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벽에 흰 종이를 붙이며 군 의원 보궐선거에 등록한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어 무투표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들은 모두 거 잘되었다고 합니다. 뽑아 놓고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며칠간 시끄러울 것이고 투표한다고 오라니 가라니 안 하게 되어 속편하게 잘되었다고 합니다. 거참 참말로 잘되었습니다. 국수가 다 되었습니다. 자전거 타고 중원 간 만조 형님도 돌아오고, 종길이 아제도 오토바이 타고 들에서 돌아오고 이장도 오고 수술 후 서울에서 휴양차 와 있는 용조 형님도 태환이 형수님도 오고, 회관에 다 모였습니다. 팥을 가리던 이장 어머니, 우리 어머니, 성민이 할머니, 만조 형님 형수, 태주 어머니, 현수 어머니 다 모였습니다. 다 모여도 이만큼밖에 안 됩니다. 당숙모하고 재구 어머니하고 담배 집 할머니가 안 보여 어디 가셨냐니까 순창 고추장 축제에 가셨다고 합니다. 종만이 아저씨 내외는 이웃 마을 새집 짓는 처갓집으로 밥 먹으러 가신다고 가셨습니다. 마을 끝에 있는 길에는 한수 형님 형수씨와 현석이 어머니 둘이 이마를 마주대고 오전 내내 콩을 가리는지 팥을 가리는지 꼼짝을 않고 앉아 있어서 내가 국수 먹자고 고함을 질러도 고개만 조금 들더니 그냥 일을 합니다. 그냥 우리들끼리 국수를 먹었습니다. 직불금 타 가는 나리님들
희고 고운 손이 생뚱맞소 국수를 배터지게 먹고 집에 와서 티브이를 틀었더니, 쌀 직불제 문제가 벌써 네 탓 내 탓 꼬리를 사릴 낌새를 보입니다. 티브이 끄고 회관에 나가 보았더니 어머니들이 비닐 덕석 위에 엎디고 한팔 베고 모로 누워 팥을 가립니다. 세상 편해 보입니다. 허리가 아파서 그런답니다. 졸리기도 하구요. 딴 나라 같습니다. 세상에 이런 평화가 따로 없을 듯합니다. 자기들끼리 나라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지지고 볶고 삶고 생난리 지랄들을 하든 말든 이 노인들은 붉은팥 속에 벌레 먹은 팥을 가려내며 고시랑고시랑 느긋하고 한갓집니다. 그러다가 어떤 어머니가 푸석푸석 말라가는 단풍 든 앞산을 보며 “날이 저렇게 가물어도 쓰까?” 하니 “섬진강 물이 다 마르기야 허겄어. 여그 섬진강 시인 있고만” 합니다. 나는 “으잉?” 하며 놀랍니다. 그러곤 또 무심히 팥을 가립니다. 자기 집 잔일이 다 끝난 동네 할머니들이 이렇게 모여 다른 집 일을 자기 집 일처럼 한 가지 두 가지 달려들어 추려냅니다. 일 년 내내 그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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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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