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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6 18:34 수정 : 2008.11.16 18:34

김용택의 강가에서
27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 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 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 타작, 콩 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잉”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뚤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노랗게 지붕을 이던
그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시 ‘그 여자네 집’ 주인공이 살던 ‘그 여자네 집’은 내가 평생을 다니던 덕치초등학교와 우리 집 중간에 있습니다. 내 일생을 담고 있는 덕치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작은 시내와 작은 들 건너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동네 속에 있는 그 여자네 집이 보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내 교실로 놀러 왔기에 “여보, 여기서도 그 여자네 집이 보이네” 했더니, “저 유리창에 썬팅을 해버려야지” 하데요. 그 여자 이야기를 새로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 여자를 만났거든요. 세상에, 그 여자가 내가 지나다니는 그 길가에 있는 그 옛날 그 감나무에서 감을 따고 있었습니다. 하늘로 고개 쳐든 모습이 깜박, 옛날 그 모습이었지요. 하도 반가워 차창을 열고 그 여자에게 인사를 했지요.

김용택 시인
“아, 안녕하세요?” 그 여자도 나를 얼른 알아보고 감을 따던 대나무 장대를 감나무 가지에 기대 놓은 채 “집에 가요?” 하데요. “시방도 여그서 다녀?” 하면서요. 하늘이 파랗게 아름다웠습니다. 그 여자 옆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저씨가 한 분이 서 있데요. 세상에, 그 여자 남편인가 봐요. 내가 안녕하세요 했더니, 그 남자도 나에게 인사를 하데요. 사람 좋게 늙어가는 남자였습니다. 그 남자 옆에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어서 “손잔가 봐?” 그랬더니 “큰손자” 하데요. 들판은 텅 비었습니다.

햇살은 곱지요. 마른 풀들, 곱게 피어 있는 산국, 먼 들 끝에 강물, 그리고 싱싱한 배추밭과 파란 하늘에 걸린 붉은 감들, “나 갈게. 안녕히 계세요” 하고 그 여자와 그 여자 남편에게 인사를 했지요.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 그 여자가 그 여자네 감나무에서 감을 따네” 그랬더니, “왜 하필이면 오늘 감을 따?” 하데요.

지난 추석 때도 그 여자를 보았습니다. 우리 차와 마주 오는 차가 좁은 길에서 잠깐 비끼며 멈추었는데 옆 차 안에 있던 여자들이 “야, 용택이 오빠다” 하며 창문을 열고 호들갑을 떨어대며 나를 부르데요. 그러고는 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언니, 용택이 오빠야, 용택이 오빠” 하길래 나는 자연스럽게 뒷좌석 여자를 바라보았지요. 그 여자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여자’ 얼굴에서 ‘그 여자’ 그림자가 가을 햇살 속 감나무 실가지 그늘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얼른 아내더러 여보 그 여자야 서로 인사해 했더니, 아내가 차에서 내려 그 여자에게 “안녕하세요. 제가 김용택 선생 안사람이에요. 얼굴이 참 곱네요” 하니 그 여자가 빙긋 웃데요. 서로 헤어져 가다가 안사람이 “참 안심이 되네요” 하데요. 내가 왜? 그랬더니 그 여자가 곱게 늙은 걸 보니 잘사나 봐요 합디다. 잘사는지 못사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환한 걸 보니 그런대로 잘살아 보였습니다.

봄이면 살구꽃이 곱게 피던 그 여자네 집은 지금 빈집입니다. 그 빈집에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지고 있습니다. 초가지붕 위에 그 여자 오빠와 그 여자 아버님이 노랗게 지붕을 이던 그때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자꾸 아른거리네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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