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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29 아이들을 위하여-겨울 밤 이야기
“이놈의 쥐가 글쎄…” 밑도끝도 없는 옛이야기에눈 오는 소리도, 부엉이 울음도 들리지 않았지요 할머니가 사시는 큰집 행랑채 소죽 끓이는 방은 보통 때 집안 어른들의 쉼터였고, 회의 장소였고 때로 다툼의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 방에 모인 집안 어른들은 동네 이집저집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우리 집안의 대소사들을 의논하고 결정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우리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로 대판 싸우기도 했습니다. 할머니 방은 늘 담배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할머니, 큰아버지 두 분, 작은아버지 한 분 그리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다섯 분이 담배를 동시다발적으로 피워대기 때문에 할머니 방문을 열면 담배 연기들이 굴뚝의 연기처럼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싸움이 나 며칠 동안 어른들의 발길이 뜸하면 우리들은 이때다 하고 할머니 방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들은 할머니 화롯가에 빙 둘러앉아 불을 쬐며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할머니, 이야기해주세요.” “인자 없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으응, 그래도 할머니이이이.” “이야기 다 해버렸대도 그런다.” 할머니는 우리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화로를 뒤적여 잉걸불로 담뱃불을 붙이시며 무심하게 이제 할 이야기가 없다고 늘 잡아떼셨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바짝 조르고 조르면 할머니는 움푹 팬 볼로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그래 그러면 딱 한자리만 한다” 하시며 우리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담배 연기를 따라 옛날이야기들이 무궁무궁 펼쳐졌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몇 번씩 들은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쩔 때는 전쟁 때 겪은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해주셨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쥐게도 하고 방을 데굴데굴 구르게 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다른 형제들은 다 자고 나만 혼자 오뚝 앉아 할머니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날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당에 눈 쌓이는 소리도 잊었고, 긴긴 겨울밤에는 뒷산에서 부엉이가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들이 또 대판 싸운 어느 날 밤이었지요. 우리 사촌형제들이 할머니 방에 모였습니다. 우리들은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또 졸랐습니다. “할머니 아주 긴 이야기를 해주세요. 끝이 없는 이야기요.” “호랭이 물어 간다. 끝이 없는 이야기가 어딨어.” 그러시면서 할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옛날에 백두산보다 더 큰 쥐가 살았단다.” 할머니는 긴긴 담뱃대로 화롯불을 뒤적여 대통에 불을 붙였습니다. 어쩔 때는 호롱불에 대고 담뱃불을 붙일 때도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볼이 푹 패게 담뱃대를 빨자 대통에 빨간 불이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입에서 담배 연기가 퍼졌습니다. 우리들의 눈은 담배를 빠는 할머니 입에 다 모아졌습니다. “그 쥐가 중국 땅 그 넓고도 넓은 땅을 다 돌아다니며, 중국에 있는 모든 곡식과 과일들을 다 뒤져 먹고는 드디어 백두산을 넘어 조선 땅으로 넘어와서는 차근차근 조선 땅의 모든 곡식들을 다 뒤져 찾아 먹기 시작했단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신 할머니는 우리들의 긴장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번 담배를 깊숙이 쭈욱 빨았습니다. 담배 연기가 할머니 입에서 나와 천장으로 올라가더니, 방안으로 쫙 펴졌습니다. “그래서요.” 우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할머니의 입을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무심한 얼굴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의 무심한 얼굴은 우리들을 더 긴장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쥐는 조선 땅의 모든 곡식을 다 뒤져 먹은 뒤, 제주도로 건너가 제주도의 모든 곡식을 또 그렇게 다 먹어 치우고는 일본으로 가려고 제주 앞바다에 툼벙 뛰어들었단다. 그리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지. 툼벙, 툼벙, 툼벙, 툼벙, 툼벙, 투움벙, 투움버엉.” 우리들은 눈이 빠지게 할머니를 쳐다보며 다음 이야기로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그냥 무심하게 띄엄띄엄 툼벙, 툼벙, 투움벙 소리만 하고 계셨습니다. 참다 참다 참지 못한 누군가가 “할머니, 그만 툼벙 하시고 이야기 계속해주세요” 하며 할머니의 툼벙 소리를 잘랐습니다. “가만히 있어봐. 이놈의 쥐가 아직 열 발도 못 갔구나. 툼벙, 툼벙, 툼벙.” 우리들은 또다시 “에이, 할머니이이-”를 부르며 이야기가 새로운 단계로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할머니는 우리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만 뻑뻑 빠시면서 “가만히 있어봐. 담뱃불이 꺼질라고 헌다. 툼벙, 툼벙.” 할머니의 속셈을 알아차린 우리들은 더 이상 쥐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벌렁 뒤로 자빠지며 “할매 그만! 할매 그만!”을 외쳤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뒤로 자빠져 발을 동동 구르고 뒹굴다가 일어난 우리들은 다시, 할머니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할머니가 한참을 또 담배를 피우시며 우리들의 애를 태우다가 그러면 조용히 해라. 이야기를 하마. 할머니는 또 화로를 뒤적여 잉걸불을 찾아 대통에 불을 붙이며, 이야길 꺼내셨습니다. 우리들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할머니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옛날, 옛날 아주 멀고 먼 옛날, 중국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단다. 메뚜기 떼들은 넓고 넓은 중국 땅을 날아다니며 중국 천지에 모든 곡식과 나무와 풀을 다 뜯어 먹고는 드디어 백두산 근처에 다다랐단다. 메뚜기 떼가 어찌나 극성맞게 먹을 것들을 먹어 치우는지, 메뚜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곡식 한 톨 남아나지 못했다는구나. 백두산 근처에 아주 큰 부자가 살았는데, 드디어 메뚜기 떼가 그 부잣집엘 들렀단다. 그 집은 큰 부잣집이었기 때문에 뒤주가 앞산만큼 컸단다. 벼를 담아두는 그 뒤주에 아주 자그마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지. 메뚜기가 한 마리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작은 구멍 말야. 메뚜기 떼들이 그 뒤주에 달라붙었어. 그러고는 메뚜기 한 마리가 드디어 그 작은 구멍을 찾은 거야. 메뚜기 한 마리가 그 구멍으로 들어가더니, 벼 알 하나를 물고 나왔다. 그 다음, 또 한 마리가 그 구멍으로 들어가더니, 벼 알 하나를 물고 나왔다. 또 한 마리가 들어갔다가 나왔다. 또 한 마리가 들어갔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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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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