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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우리 집 나의 방 32
방문을 열면 앞강과 앞산의 꿈틀거림이 보이고먹장구름같은 고민과 밤바람 소리에 괴로웠던… 우리 집은 동네 중간쯤에 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지은 집이지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님은 초가삼간 집을 짓고 살면서 새로 지을 집 나무들을 산에 베어두었다가 말린 후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산에서 베어낸 기둥감이며 서까랫감이며 중방(기둥과 기둥을 가로로 연결하는 나무)감들을 골짜기 아래로 굴려 쌓아 놓았다가 큰 비가 와서 골짜기 물이 불어나면 나무들을 물에 띄워 마을로 떠내려 보냈지요. 그렇게 한 개 두 개 모아놓은 나무로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지을 때 목수 두 분이 오셨습니다. 마당에다가 나무들을 널어놓고 목수들은 나무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려 앞기둥감으로 뒷기둥감으로 중방감으로 개보(마루 위에 양쪽으로 걸치는 큰 나무)감으로 차례차례 다듬어 갔습니다. 기둥을 이쪽 면이 앞으로 오게 세울까 저쪽 면을 뒤로 가게 세울까 이 나무 저 나무들을 이리저리 겨누고 먹줄을 튕겨 다듬고 구멍을 뚫고 깎아내고 썰어냈습니다. 나무 하나를 놓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뒤적이며 생각에 빠진 목수들의 깊은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닥불 가에 앉아 목수의 연장으로 자기 집에 쓸 구유도 만들고 지게도 만들고 여물바가지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목수가 “어이, 남의 연장 가지고 자기 일만 하지 말고 이리 와봐. 이 나무좀 들어 이쪽으로 옮기게.” 하면 나무를 들어 옮겨주었습니다. 기둥을 세울 때는 집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달려들었습니다. 하얗게 깎아진 나무들이 쌓여 있고, 여기저기 하얀 대팻밥과 목침 같은 나무토막들이 널려 있는 마당은 아름다웠습니다. 하얀 기둥이 다 세워지고 하얀 서까래가 얹혀진 후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지붕에 흙을 얹고 벽을 붙였습니다. 나래가 이어지고 구들을 놓고 굴뚝으로 연기가 올라갔습니다. 이사를 드는 날 동네 사람들이 마당을 밟으며 밤새워 굿치고 놀았습니다. 집을 다 짓는 동안 나는 목수들이 도면을 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집은 도면 없이 지어진 4칸 홑집입니다. 해와 달과 바람과 비와 새와 작은 벌레들과 동네 사람들의 손이 모아진 이 집은 풀과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집입니다. 아버님은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살다가 자기가 지은 집 방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요. 내 방은 창호지 문입니다. 방문을 열면 앞강과 앞산이 보입니다. 해 저문 강물 속에서 고기들이 하루살이를 차 먹기 위해 물을 차고 하얗게 뛰는 모습이 보입니다. 앞산에서 꽃이 피고 새잎이 피고 꾀꼬리가 날며 울고 아버지들이 보리를 갈기 위해 쟁기질을 하고 어머니들이 밭 매고 비가 오고 눈이 내려 강물로 사라지는 모습들이 훤히 보입니다. 지금도 책이 한 쪽 문만 가리고 있고 다섯 쪽 문은 환하게 햇살을 받아들입니다. 방에는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의 책들이 그때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 방처럼 80년대 그 시절 그 책들이 그대로 쌓여 있는 방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내가 책을 보기 시작한 것은 선생이 되어서입니다. 아주 작은 분교에서 나는 선생을 시작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한 시간쯤 걸어가야 하는 곳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월부 책장수가 책을 팔러 왔습니다. 월부 책장수는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나에게 권했습니다. 처음 내 돈 주고 책을 샀습니다. 책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겨울 방학 내내 나는 그 책을 읽었습니다. 밖엔 눈이 왔지요. 달빛이 내 방안을 찾아들었고, 창호지 문에 햇살이 눈부셨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밥을 먹는 일과 화장실 가는 일만 빼고 나는 책에다가 코를 박고 살았습니다. 책을 읽다가 밖에 나가면 바람이 불었지요. 날이 좋으면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나무를 갔고, 눈이 사나흘 오다가 그치면 눈 그친 하루 후에 산으로 토끼를 잡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토끼를 몰며 우린 눈이 부신 산을 헤맸지요. 그러고는 밤을 새워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방학이 끝나자 나는 작은 들을 걸어 학교에 갔습니다. 홀로 걷는 들길에 내 발걸음은 방학 전과 달랐지요. 가슴속에 그 무엇인가가 출렁였습니다. 산을, 강을, 들을, 나무와 발밑 땅을 새로 둘러보았습니다. 풀과 나무와 흙, 동네사람들 손이 엮어진 이 집
터진 창호지 틈으로 겨울햇살 한줌 떨어집니다
방학이 되면 전주로 가서 헌책들을 샀지요.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전주로 간 나는 헌책방들을 뒤져 오래된 문학잡지들을 샀습니다. 커다란 가방 가득 책을 사서 차에 싣고 시골 정류소에 내려 미리 가져다 놓은 지게에다가 책을 짊어지고 집으로 가 방에 쏟았습니다. 가방 속에서 책들이 우르르 방으로 쏟아질 때, 그 가슴 벅차던 때를 나는 잊지 못합니다. 나는 방학 동안 그 책들 속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도 <창작과 비평>도 <문학과 지성>도 <계간미술>도 그렇게 헌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책은 달고 쓰고 맵고 시고 떫었지요. 머릿속이 환해지지다가 캄캄해지고, 그 끝에서 다시 환해졌지요. 실낱같이 생각들이 이어지고 먹구름 같은 고민들이 몰려와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방안을 찾아든 달빛을 견디지 못했고, 빗방울 소리에 괴로워했고, 앞산을 훑고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에 잠자리를 뒤척였습니다. 산그늘 속의 풀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괴로웠고, 깊은 밤 소쩍새 소리 때문에 앞강에 나가 강물을 보며 오래도록 서 있었습니다. 홀로 저문 강변을 헤매다가 물소리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때로 바위 뒤에 앉아 물소리에 기대어 놀았지요. 풀씨들이 옷에 달라붙었습니다. 새벽까지 잠 못 들고 뒤채이면 서서히 방이 식어갔습니다. 몸을 웅숭크리기 시작하면 아버님이 소죽을 끓이러 나오셨습니다. 불길이 방안으로 훌훌훌 들어오고 창호지 문에 불빛이 따사로웠습니다. 타닥타닥 나뭇가지 타는 소리가 들리고 등이 따뜻해져 오면 나는 흥건한 잠속으로 빠져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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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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