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강가에서
33 배는 돌아오리라!
우리의 작은배는 추운바다 끝에서
마침내 해를 싣고 다시 찾아오리라
신발 뒤꿈치에 걸린 그리운 햇살…
꽃을 피우는 봄바람도 불러오리라
밤이 올 때까지
하루종일 집에 혼자 있었다.
아이들이 장난감 총을 들고 뛰다가 은폐물 뒤에 숨어
삥요, 삥요 하얀 총알들을 쏘아댄다.
앞산과 뒷산 사이
고향 마을 작은 논밭에 찬바람이 불고
하루종일 동네는 비어 있을 것이다.
바람이 앞산을 지나가면
텃논 지푸라기들이 머리칼을 곤두세우며 끌려다니고
참나무 잎들은 수런거리며
앞 강물을 흔들 것이다.
저녁이면 잔물결이 살얼음이 되어 강을 조인다.
눈발이 강물로 날린다.
들에서 손과 발을 거두어들인 농부들은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을 찾아 몸을 묻으리라. 한해 묵은 씨앗이 되리라.
농부들의 밤은 길고 새벽을 더듬는 손과 발은 흙에서 오래도록 전통이다.
지난가을 어머니는 땅 위로 파랗게 솟은 무를 뽑아 하얗게 채를 썰고 파란 무잎을 뭉텅뭉텅 잘라 넣고 고춧가루를 뿌려 벌겋게 생채를 만들어 술밥처럼 고슬고슬한 햅쌀밥과 함께 비볐다. 고춧가루를 몸에 바른 싱싱한 무잎은 밭으로 도망갈 것 같았다. 콧등에 땀이 솟았다. 무 뽑힌 움푹한 땅에 마른 풀잎들이 모이고 양지쪽에서는 바람 부는 햇살로 곶감이 마른다. 아! 어머니 얼굴같이 바람과 햇살로 마른 곶감은 달다. 아버지는 달빛으로 지붕을 일 나래를 엮어 마당에 세워두었다. 어린 형제들이 나래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동안 참새들은 나래 위에 내려앉아 벼 알을 찾으며 놀았다. 어머니는 무청을 자르고 텃밭에 구덩이를 파 무를 캄캄하게 묻었다. 밤이 왜 이리 긴가. 자다가 일어나 밖을 보고, 자다가 일어나 또 밖을 본다. 아버지가 오실 때가 되었는데, 산에 간 아버지가 오실 때가 되었는데 … 등 넓은 아버지는 ….
지구의 저쪽에서는 아이들이 굶어죽고, 지구의 이쪽에서는 어른들이 배 터져 죽는다. 돈이 지구를 흔든다. 돈의 음모, 돈의 잔혹, 돈의 탐욕, 돈의 배반, 돈의 전쟁, 돈의 야만, 돈의 타락, 아, 돈! 돈! 돈! 돈! 돈짝이 된 얼굴들.
배부른 자들은 배고픈 아이들 손에 쥔 마른 빵조각을 빼앗으려 음모를 꾸민다. 총구는 사람들을 향해 정조준 되어 있다. 사랑은 낡았다. 인류는 한 가지 사랑으로 너무 오래 살았다. 혁명의 시대는 가고, 시인들은 쓰레기를 뒤져 팔 것을 찾는다.
지구는 가물고
바다는 차오른다.
흙이 모래가 되고 나무와 풀잎이 타 죽는다.
땅을 허물고 강의 길을 돌릴 때
고통이 낳은 자식들은 길을 잃고 강둑에 서서 목메어 운다.
나비들은 피를 말리며
강물 위를 난다. 아이들아, 가난하여라! 마른 나뭇잎들이 강물 위에 뜬다.
처녀들의 맨발은 흙속에서 아름답다. 땅은 사랑을 키우고 꽃을 키운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 하여라. 또 사랑하라.
처녀들이 저녁을 맞으러 맨발로 강을 건너간다.
나비처럼 날개를 적시며 강을 건너간다. 다쳐도 나는 나비여! 깊은 상처로 나는 나비여! 눈부시게 아름답구나.
이별은 생 전체를 뒤적이게 하고 그 뒤적임이 생살을 파는구나. 그 쓰라림이 이렇게 멀고도 아득하게 외로울 줄을 사랑할 때 어찌 알았겠느냐.
삼단 같은 머릿결은 날려 강물이 닿으리. 새로 오는 봄이면 푸른 벌레를 입에 물고 강을 건너 잎 넓은 가랑잎 사이 새로 지은 집을 찾아 날아드는 작은 새를 나는 보았다네.
때로 시골 길을 자박자박 걸을 일이 생긴다. 너를 만나려면 나는 네가 보았던 나무와 산과 강과 들, 그리고 네가 밟았던 달빛을 밟으며 걸어가야 한다. 강물을 옆에 두고 너는 지붕이 낮은 집에 산다. 빨래를 이고 강으로 갔다가 오고, 일상을 털어낸 흰 빨래를 바람과 햇살 속에 널어놓고 너는 키 발 딛고, 하늘이 높지만
신발 뒤꿈치에 고인 아! 그리운 햇살, 구름은 높고 바람은 네 머리칼을 날린다.
두렵다. 빛나는 얼굴, 산에 비치는 네 뒷모습은 사랑하여 두렵고
겁 난다. 사랑은 등 뒤에서 오래 운다.
새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서 새끼를 길러 날려 보내고 작은 나뭇가지를 찾아 날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사막에 집을 지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집이 좁다고 넓힐 것이고
어떤 이들은 하늘이, 허공이 내 것이라고 집을 높일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우주로 간다.
자루에 담긴 콩은 아랫목에서 해와 달과 바람을 안고 어머니와 함께 오래 잔다.
나는 두려움이 없다. 시가 내 안에 있어서, 해와 달과 바람과 비가 들이칠 내 안에 씨가 있어서, 찬란함은 늘 삶과 죽음, 그 양면의 빛이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다다른 곳이 늘 처음이었다. 나는 이제야 예의를 배운다.
더 두고
더 먹고
더 가고
더 살려고 삶을 늘이지 말라. 사람들은 어제의 걱정을 도로 가져오고 내일에서 근심을 미리 사온다. 그리고 오늘은 제 무덤을 제가 판다. 뭣들 하느냐? 하는 짓들이 벌레만도 못하구나. 길가에 돋은 풀잎 하나를 보지 못하고 도대체 살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냐? 눈물이 고이는가. 귀먹고 눈멀었구나. 차라리 가난이 낫다. 지구는 마른 풀잎들을 잡고 저 혼자 돌아간다. 사막이다. 풀이 자라지 못할 먼지가 입안 가득 고이리라. 모래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다.
바람을 다오. 바람아, 꽃이 피는 봄바람을 불러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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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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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끝을 찾기가 이리 힘이 드는데, 절망의 끝은 어디인가. 어머니는 호롱불 끝에서 실 끝을 찾아 바늘에 실을 꿰었다. 어머니의 밤은 얼마나 깊었을까. 보이지 않는다고, 실 끝을 태우지 말라.
할머니는 이가 없었다.
깊고 깊은 겨울밤이면 어머니는 텃밭 무 구덩이 속에서 무를 꺼내다가 누런 놋숟갈로 무를 긁어 할머니 입에 넣어 주었다. 긁히면서 무에서는 시원한 물방울들이 하얗게 튀었다. 분말 가루 같은 작은 물방울들은 호롱불 주위를 부유했다. 희미하게 무지개가 떴다가 사라지고, 무지개가 떴다가 희미하게 사라지며 무는 깊이 파였다. 흰 무속을 다 긁어먹으면 무는 작은 배가 되었다. 어머니는 배가 된 무속에다 노란 콩을 가득 넣어 어둠속 멀리 떠나보냈다. 며칠이 지나면 무는 푸른 모자를 쓴 콩들을 가득 싣고 우리 집까지 흘러들어와 문턱을 탁탁 들이받았다. 눈을 뜨라!
춥고 어두운 겨울 바다 끝에서
해를 싣고 집을 찾아오는 외로운 배여!
마침내
배는 돌아오리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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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를 마치며
한 해가 오더니 그 해가 갑니다.
정말,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언제 우리가 마음 놓고 편히 살 때가 있었는지요.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땅을 딛고 해 아래 서고
시인이 시를 쓰겠습니까. 힘을 내야지요.
낙관이 늘 시대의 고통과 절망의 역사를 설득해 왔습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많은 것들을 반성하고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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