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가 공지영
|
[매거진 Esc] 공지영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①
강연 끝나고 “멋진 엄마세요” 말 듣던 그 순간
휴대용 게임기와 팬티 두 장 달랑 싸서…
맏딸은 심드렁하고 둘째는 “독도에…” 딴청만
소설가 공지영씨가 이번주부터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를 연재합니다. 작가가 일상에서 건져올린 작지만 울림이 큰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시길 권합니다. 편집자
4학년짜리 막내 제제가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안 것은,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가출을 하려고 시도를 한다는 것을 안 것은 어떤 여대의 강연이 막 끝난 후였다. 꺼놓았던 휴대폰을 켜는데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집에서 온 것으로 막내가 집을 나가려고 하니 어서 집으로 전화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단 전화기 들고 여유 있게 웃어야 했는데… 아침에 오랜만에 아이의 가방 검사를 하는데 하지 않은 숙제와 준비하지 않은 준비물과 괴발개발 써놓은 알림장을 보고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교육상 꼭 들어야 할 좋은 말을 좀 큰 소리로 해 준 다음, 이따가 방과 후에 엄마와 다시 이야기하자는 말을 해놓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나 보았다. 강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기 위해 따라 나온 여대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상황에서 나는 일단 전화기를 들고 어쨌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웃고 있어야 했는데 마침 내게 다가와 누군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나와 소송을 두 번이나 한 적이 있는 여성지의 기자였다. 여성지 이야기는 나중에 이 지면을 통해 따로 할 시간이 있겠지만 나는 하느님이 “지영아, 지영아,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지?” 물어보면 “네 하느님, 그건 여성지입니다”라고 대답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밝혀둔다.
가장 무서운 건 여성지 기자인데 그 기자가…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받아보니 맏이인 딸이었다. 딸아이 말로는 막내가 짐을 싸가지고 - 그 짐 속에는 휴대용 게임기와 팬티 두 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 집을 나가려고 하고 있어서 아줌마가 현관에 의자를 놓고 지키고 있다고 했다. 여대생들은 책을 내밀어 사인을 청하면서 “선생님, 너무 멋진 엄마세요” 하고 있고, 무서운 여성지 기자는 내게 사생활의 기미를 알아보려고 영민한 눈을 굴리고 있는데 나는 하는 수 없이 미소를 띠며 상냥한 목소리로 “그래, 그러렴”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언제나 생각하는 일이지만 공교롭다는 말은 참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지는 때가 많다. 세상이 생겨난 이래 얼마나 공교로운 일이 많았으면 공교롭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나에게는 특히 삶의 징크스가 몇 가지 있는데 그게 이렇게 강연과 관계된 때가 많았다. 이럴 바에야 앞으로는 뭐 이런 강연을 하는 것이… 소설에도 쓴 일이 있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강연해야 할 때는 집안에서 몹시 비페미니즘적인(?) 일들이 일어나질 않나, <즐거운 나의 집>을 맏딸 위녕의 시각으로, 어디까지나 엄마를 이해하는 시각으로 쓰고 있을 때는 그 아이가 가장 속을 썩이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즐거운 나의 집>을 마치고 가족의 의미는 사랑입니다, 어쩌구 강연을 하는데, 그때는 둘째 둥빈이 때문에 학교에 자주자주 불려가곤 했던 것이다. 이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나자, 믿었던 막내 제제마저 가출을 하려 한다니…. 이럴 바에야 앞으로는 <인세 수입 한 푼 없이 잘사는 법>이라든가, <미모가 완전히 망가지고 난 후의 삶> <멋있는 남자들이 나를 싫어할 때> 뭐 이런 강연을 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야 공교롭게도 그 반대되는 일이 일어날 테니까 말이다.(아아,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일 거 같다.)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내가 돌아올 시간 맞춰…
![]() |
“나 제제다… 절대 집에 안 갈 테다” / 일러스트 이민혜
|
![]() |
일러스트 이민혜
|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졸업(2008)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