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05.22 13:40 수정 : 2008.05.26 14:18

소설가 공지영

[매거진 Esc] 공지영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①
강연 끝나고 “멋진 엄마세요” 말 듣던 그 순간

휴대용 게임기와 팬티 두 장 달랑 싸서…

맏딸은 심드렁하고 둘째는 “독도에…” 딴청만

소설가 공지영씨가 이번주부터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를 연재합니다. 작가가 일상에서 건져올린 작지만 울림이 큰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시길 권합니다. 편집자

4학년짜리 막내 제제가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안 것은,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가출을 하려고 시도를 한다는 것을 안 것은 어떤 여대의 강연이 막 끝난 후였다. 꺼놓았던 휴대폰을 켜는데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집에서 온 것으로 막내가 집을 나가려고 하니 어서 집으로 전화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단 전화기 들고 여유 있게 웃어야 했는데…

아침에 오랜만에 아이의 가방 검사를 하는데 하지 않은 숙제와 준비하지 않은 준비물과 괴발개발 써놓은 알림장을 보고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교육상 꼭 들어야 할 좋은 말을 좀 큰 소리로 해 준 다음, 이따가 방과 후에 엄마와 다시 이야기하자는 말을 해놓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나 보았다. 강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기 위해 따라 나온 여대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상황에서 나는 일단 전화기를 들고 어쨌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웃고 있어야 했는데 마침 내게 다가와 누군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나와 소송을 두 번이나 한 적이 있는 여성지의 기자였다. 여성지 이야기는 나중에 이 지면을 통해 따로 할 시간이 있겠지만 나는 하느님이 “지영아, 지영아,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지?” 물어보면 “네 하느님, 그건 여성지입니다”라고 대답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밝혀둔다.


가장 무서운 건 여성지 기자인데 그 기자가…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받아보니 맏이인 딸이었다. 딸아이 말로는 막내가 짐을 싸가지고 - 그 짐 속에는 휴대용 게임기와 팬티 두 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 집을 나가려고 하고 있어서 아줌마가 현관에 의자를 놓고 지키고 있다고 했다. 여대생들은 책을 내밀어 사인을 청하면서 “선생님, 너무 멋진 엄마세요” 하고 있고, 무서운 여성지 기자는 내게 사생활의 기미를 알아보려고 영민한 눈을 굴리고 있는데 나는 하는 수 없이 미소를 띠며 상냥한 목소리로 “그래, 그러렴”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언제나 생각하는 일이지만 공교롭다는 말은 참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지는 때가 많다. 세상이 생겨난 이래 얼마나 공교로운 일이 많았으면 공교롭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나에게는 특히 삶의 징크스가 몇 가지 있는데 그게 이렇게 강연과 관계된 때가 많았다.

이럴 바에야 앞으로는 뭐 이런 강연을 하는 것이…

소설에도 쓴 일이 있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강연해야 할 때는 집안에서 몹시 비페미니즘적인(?) 일들이 일어나질 않나, <즐거운 나의 집>을 맏딸 위녕의 시각으로, 어디까지나 엄마를 이해하는 시각으로 쓰고 있을 때는 그 아이가 가장 속을 썩이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즐거운 나의 집>을 마치고 가족의 의미는 사랑입니다, 어쩌구 강연을 하는데, 그때는 둘째 둥빈이 때문에 학교에 자주자주 불려가곤 했던 것이다. 이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나자, 믿었던 막내 제제마저 가출을 하려 한다니…. 이럴 바에야 앞으로는 <인세 수입 한 푼 없이 잘사는 법>이라든가, <미모가 완전히 망가지고 난 후의 삶> <멋있는 남자들이 나를 싫어할 때> 뭐 이런 강연을 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야 공교롭게도 그 반대되는 일이 일어날 테니까 말이다.(아아,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일 거 같다.)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 내가 돌아올 시간 맞춰…

“나 제제다… 절대 집에 안 갈 테다” / 일러스트 이민혜
집으로 돌아와 보니 결국 막내는 전철역으로 두 정거장 떨어진 아빠의 집으로 가출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학교에서 돌아와 우선 자신에게 할당된 컴퓨터 게임 시간을 충분히 채운 다음 아줌마에게 밥을 달래서 한 그릇을 다 먹고 엄마가 언제쯤 돌아오느냐고 묻더니 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가출을 한 것이었다. 일단 집안 식구와 아줌마에게 절대 제제에게 연락을 하지 말고 쥐죽은 듯이 기다리라고 한 다음, 나는 딸아이를 불러 야단을 쳤다. 어린 동생이 가출하는데 누나로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딸아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엄마. 내가 제제야 너 정말 그렇게 집에 있기 싫으면 누나랑 같이 일단 가출을 해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거 먹고 밤늦게 돌아오자고 했어. 그러니까 제제 말이 그래도 싫대. 밤늦게 돌아와도 엄마가 있을 거 아니냐고 말이야.” 그러면서 덧붙이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돌아올 건데 뭘.”

그러자 갑자기 딸아이가 가출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너도 만감이 스쳐 지나갔겠구나” 하니까 딸은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하더니 방으로 휑하니 들어가 버린다.

“나 제제다. 절대 집에 안 갈 테다” 문자 보고 안심

저녁을 먹고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뉴스를 보고 있는데 아들 둥빈이 방에서 어슬렁거리며 나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형으로서 전혀 고민이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제제가 집에 없어서 기분이 어떠니?” 하니까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것이었다. 대체 너희는 우애라는 것도 없니, 라고 좋은 말을 큰 소리로 해주려고 하는데 둥빈이 난데없이 심각하게 묻는다.

“엄마, 저 날씨 예보 말이야. 이상한 게 있어. 전에 보니까 독도에 울릉도에 대설주의보를 발령하는 건 왜 그래? 울릉도는 그렇다 쳐도 독도에 대설주의보는 왜 내려?”

갑자기 머릿속이 꼬불거리는 기분이었다. 동생이 가출한 이 봄에 독도에 대설주의보는 뭔 말? 싶어서 건성으로, “독도가 우리 땅이잖아” 대답하니까 둥빈이 다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한다.

“그런데 남쪽의 마라도, 북쪽의 중강진, 서쪽의 연평도는 잘 안 나오잖아. 독도에 눈이 많이 내려봤자 무슨 일이 나겠어?”

침실서 아무 책이나 들었는데 하필이면…, 미춰!

기상캐스터는 아닌 게 아니라 그날도 울릉도 독도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둥빈이 여드름을 뜯으며 다시 심각하게 말한다.

“독도 병사들한테 휴대폰을 해주면 되잖아. 꼭 저렇게 방송으로 해야 하나? 거기 군인들이 텔레비전을 볼 수는 있나?”

듣고 보니 참 일리가 있었다. 그때 휴대폰으로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제 아빠의 번호가 찍힌 그 핸드폰에는 이런 말이 써 있었다.

“나 제제다. 지금은 밤인데 절대 집에 안 갈 테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나는 집 안의 불을 끄고 내 침실로 들어와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며칠 전부터 읽고 있던 <좋은 부모가 되는 법>이었다. 제제가 늘 하는 말이 떠올랐다. 미춰! / 공지영 소설가

일러스트 이민혜
일러스트 이민혜

2005 대학생 그림책 디자인전 참가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졸업(2008)

[한겨레 창간 20돌] 연재 작가 공지영·김용택·안도현 대담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