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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25 21:35 수정 : 2008.06.25 21:35

결점이 보일 땐 패랭이 꽃 떠올리네

[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모조품은 완벽하게 싱싱하지만 진품은 죄다 쓸모없는 군더더기를 가졌다는 사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니 …, 한 40년 전쯤의 일일 것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은행에 통장을 만들었고 그리고 그 기념으로 엄마가 주신 거금 50원짜리 지폐를 들고 은행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산만하고 덜렁거리는 성격이어서 걸어 다닐 때, 특히나 길이 좀 멀다 싶으면 꼭 노래를 부르거나 팔다리를 커다랗게 휘저으며 거의 춤을 추면서 다녔으니 그날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춤을 추는 내 손 끝에 50원짜리 지폐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었을 것이었다. 내가 집을 나서는 길에 엄마가 여러 번 돈은 꼭 주머니에 넣고 그리고 제발 한눈 좀 팔지 말고 다니라고 타일렀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그 말들쯤은 한 귀로 흘려듣고 걷고 있었다.

유리구슬 아저씨에게 사기당한 이야기

아현동 육교를 오르려는데 어떤 아저씨가-아마 19살쯤 된 아저씨였을 것이다-얘, 꼬마야 넌 참 이쁘게 생겼구나, 이리 좀 와 볼래? 하며 나를 불러 세웠다. 이것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젊은 남자가 예쁘다고 하는 말에 그만 마음이 헤, 풀어져서 나는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커다란 유리구슬을 보여주면서 내게 말했다.


“난 절대로 이걸 아무한테나 보여주지는 않아. 그런데 지나가다 보니까 네가 참 예뻐서 이걸 꼭 너한테만 보여주고 싶었어.” 그러더니 그는 손에 든 커다란 유리구슬에 한 눈을 가져다 대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저거 봐라. 어떻게 저런 게 다 보이지? 와우!” “그게 뭔데요?” 내가 물었다. 그는 유리구슬을 내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한 눈을 감고 여기에 다른 눈을 가져다 대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보여. 정말 아름다워서 혼자 보기가 아깝더라구….”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본 자의 황홀함으로 들떠 있는 듯도 했다. 한적한 육교 위에 서서 나는 그가 들이미는 구슬에 한눈을 가져다 대었다. 뿌연 유리 알맹이 너머 세상이 찌그러져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일단 입을 다물고 속으로 오십까지 세 봐. 그러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나타날 거야 …, 대신 꼭 천천히 마음을 다해서 세어야 해. 허투루 세거나 의심을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안 보이게 되어 있어.”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오십까지 세었다. 그의 말대로 천천히, 그리고 간절하게 말이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눈을 뜨니 그는 사라지고 없었고 내 손에는 커다란 구슬만 남아 있었다.

“참 이상한 사람이군” 생각하며 나는 다시 팔다리를 커다랗게 휘젓고 노래를 부르며 은행으로 갔다. 그리고 통장을 내밀었는데…, 당연히 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그에 대한 미움보다 내 어리석음에 가슴이 더 쓰렸다.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었을까 하고 말이다.

탱탱한 꽃 이파리를 뭉개버린 뒤…


결점이 보일 땐 패랭이 꽃 떠올리네
그날 은행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길었다. 가뜩이나 무엇이든 잃어버리기를 잘하는 나를 엄마가 용서할까? 얼마나 혼이 날까? 하는 생각에 나는 노래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혼이, 아주, 많이 났다. 울다가 방에 들어가 누웠는데 바지 주머니께가 배겨 왔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그 구슬이 아직도 들어 있었다. 나는 끔찍한 그 유리 덩어리를 가지고 밖으로 나와 골목길 멀리로 던져버렸다.

아직도 가끔 나는 그때를 떠올린다. 유리구슬에 눈을 대고 오십을 세고 나서도 아름다운 것이란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그 당황스러운 시야라니…. 그러고도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잘 믿는 성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아, 그런 식의 사기에 여러 번 휘말릴 때마다 내 눈앞에는 그때의 광경이 어른거렸다. 두꺼운 유리를 댄 것처럼 그냥 시야가 뿌옇게 변해버리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 같지만 젊었을 때 내가 자주 드나들던 카페 문쪽에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카페 주인은 가끔 거기다 제철 꽃을 한 아름 꽂아두곤 했다. 한번은 약속이 있어 그 카페를 오르는데 항아리 가득 꽂힌 보라색 꽃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패랭이였다. 들판에 점점이 핀 패랭이야 몇 번 본 일이 있지만 이 꽃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꽃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려 약속이 늦은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 꽃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만 패랭이 꽃무더기가 너무 예쁘니까 슬며시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게 가짜 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냄새를 맡아보았더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으나 꽃잎이 너무 얇고 탱탱해서 비닐인지 아닌지 감촉만으로는 도무지 구별되지 않았다. 얼른 올라가서 주인에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물어보면 될 것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기어이 그 꽃을 하나 따서 손으로 뭉개보았다. 가짜라면 뭉개지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순간 그 탱탱한 꽃 이파리가 뭉개지더니 손에 남보랏빛 진액이 점점이 남아 버렸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남보랏빛 멍자국처럼 내게 남은 것이었다.

그 이후로 아름다운 꽃이나 완벽한 화분을 보면 나는 저게 진짜일까 가짜일까 생각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패랭이꽃 하나를 짓이긴 이후로 다시는 살육(?)은 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그런 짓을 하지 않고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싶었던 것인데, 우연히 그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의 차이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약간 이상한 꽃 이파리들을 달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죽어 있는 것들,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싸고 맛있고 안전하다’는 거 믿을 수 있나?

누군가 너는 무슨 재미로 살아? 하고 물으면, 응 나는 인생의 비밀을 하나하나 깨닫는 재미로 살고 싶어,라고 대답하곤 하던 내게 패랭이꽃은 많은 의미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 아이들을 어떻게든 이해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때 나는 이 교훈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람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살아 있기에 보기에도 싫고 쓸모없고 심지어 버리면 더 좋을 군더더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완벽한 모양을 가지고 완벽한 초록으로 무장한 비닐 화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푸라기 같은 결점들을 그 사람이나 아이들이나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운 청사진은 그러므로 내게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난데없이 길을 가다가 “네가 너무 예쁘니 이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겠다” 는 그 어린 아저씨는 내 인생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싸고 맛있고 안전하다,라는 말인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대도시에서 자라나 일찍이 마음고생(?)을 많이 겪은 나로서는 비싸거나 맛없거나 안전하지 않은 한 가지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의심부터 하고 본다. 왜냐하면 싸고 맛있고 안전하다는 말을 믿다가 뭉개져 버리는 것은 나와 내 아이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뭉개져 버린 뒤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기 때문이다.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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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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