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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16 20:44 수정 : 2008.07.16 20:54

수치심 예방 백신을 나눠드릴까요?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악플 많이 달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는 어떻게 담담해지는 경로를 발견했나

가끔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악플 같은 거 보고 상처 입지 않으세요? 하고. 혹은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시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럴 때 마음을 어떻게 다잡으세요? 하고.

나는 상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좀 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우선 내 첫 산문집 제목이 <상처 없는 영혼>이니까 상처에 대해 할 말이 좀 있을 것이다. 또한 상처를 받고 울고 울다가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라는 제목을 생각해 냈으니 그렇다.

편집자의 한마디에 위경련을 일으킨 사연

소설을 처음 쓸 무렵에는 어떤 잡지의 편집자가 내가 보낸 소설을 두고, “그거 결말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한마디 한 것 가지고 몇 시간을 배를 붙들고 뒹군 적도 있다. 위경련이 일어나서였다. 혼자 살던 때라서 약을 구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병원에도 갈 수 없었기에 당시 내게 그 고통은 상당한 것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어쩌면 119 구급대에 신고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몇 시간 동안 나를 데굴거리게 만들던 고통은 어떤 순간 내가 눈물 한 방울을 쥐어짜자 신기하게 조금씩 가라앉았다. 울면서, 울던 와중에도 그게 너무 신기해서 계속 울어보려고 노력했던 게 떠오르면 지금은 혼자 슬며시 웃기도 한다. 그때 나는 그러니까 눈물이 일종의 치료 작용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울어보려고 노력을 했던 것이다. 울어보려고 말이다.

얼마 전 아주 가까운 친구가 실연을 당했다. 9년이나 거의 부부처럼 살던 이들이었다. 각자 아이들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나중에 함께 살자고 공기 좋은 전원에 집도 마련해 두었다. 고생을 하며 젊은 날을 보낸 친구였기에 그 남자가 그 친구에게 나타난 것이 나는 인생이 결국은 공평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친구가 한달 전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 이별을 했다고 내게 고백을 하며 울었다.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친구의 말이 그랬다.


“챙피해서 아무한테도 말 못하겠어 챙피해서….”

아직도 내가 인생에 대해 모르겠는 것은 이런 대목이다. 잘못한 것도 없고 최선을 다했으나 잘되지 않은 일에 대해, 더구나 굳이 원인을 찾자면 상대편이 훨씬 질책할 이유가 많은 것에 대해 우리는 수치심을 경험한다. 남편이 급작스레 불치병으로 죽은 친구도 그녀를 위로해주는 어떤 사람도 다 거부하며 말했다.

“사람들 보기 싫어. 아무도 보기 싫어…….”

나 역시 그랬던 거 같다. 내 불행보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은,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음에도 수치심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거 같다.

“네가 이혼한 건 수치스럽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수치스럽다는 것은 네가 책을 냈는데 글을 엉망진창으로 썼다면 그때 느껴야 하는 거야.”

그런 친구는 정작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세 번이나 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다. 고문도 심하게 당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물었다.

“너는 세 번째 잡혔을 때 무슨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친구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엄청 쪽팔린다!”

험한 공사장 현장의 팔뚝 이야기

불행이 불행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렇듯 수치심을 동반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실연당한 내 친구는 밥도 안 먹고 날마다 술만 먹고 다니더니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빠졌다. 그동안 의사가 혈압이 높다고 무조건 살을 빼라고 해서 고생이 많았는데 내가 저절로 건강을 찾았다고 농담을 하자마자, 병원에 입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병명은 아마도 심장 발작쯤 되는 거 같았다. ‘쯤 같았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그것의 원인이 어디 있는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의사는 온갖 복잡한 검사를 일주일이나 하고 나서 원인 없음………의 판정을 내렸다.

문병을 가자 친구는 또 내 앞에서 부끄러워했다. 실연당해서 부끄럽고 입원해서 부끄럽고 불행은 떼를 지어 그 친구를 덮치는 거 같았다. 나는 그 친구가 통곡이라도 하면서 울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그냥 담담했다. 그녀가 담담하니까 심장이라도 발작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았다. 그 옛날 나의 경우,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니까 위가 대신 경련을 일으킬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말야 하느님이 뭐든 해 줄 수 있는데, 너를 그 사람을 만나기 전 9년 전으로 되돌려 준다고 하면 그럴래?”

친구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사람이 지금은 떠났지만 네 곁에 있었던 것이 없었던 것보다 나은 거잖아.”

상투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 하면서 울지도 않던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 상처들을 다 이겨냈니?”

나는 내가 상처들을 이겨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해질 수 있는 경로를 좀 개발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배를 잡고 방을 데굴거리던 내가 이제는 그보다 훨씬 더 심한 말에도 5분이면 그것을 처리하고 마는 것은 확실하긴 하다. 대한민국 문단에서 악플 많이 달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는 사람은 또 이렇게 이런 삶에 적응하는가 싶기도 하다.

언젠가 남자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방학 때마다 공사장에서 험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금이야 아무리 작은 공사장에도 임시 엘리베이터가 있고, 그 엘리베이터를 물건이 오르내리지만, 그 당시만 해도 공사장에는 임시 비계들 사이로 철판이 걸쳐져 있고 사람이 직접 등에 시멘트 등을 지고 거기를 오르내렸다. 친구는 그렇게 시멘트를 날라주는 일을 했다. 더운 여름날 입고 간 티셔츠가 다 젖어버렸는데 친구는 끝까지 러닝셔츠 바람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아저씨들의 팔뚝은 멋진 근육이었는데 자신의 팔은 희고 가늘고 너무 초라해서였다. 그렇게 더위를 참고 일하던 어느날,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 티셔츠를 벗어버리고 그도 러닝셔츠 바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지나치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혼자서 웃었다고 했다. 유리창에 비친 그의 팔뚝은 그가 부러워하던 다른 이들처럼 근육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처받는 건 살아 있다는 징표

나는 힘이 들 때마다 친구의 이 말을 떠올리곤 했다.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그리로 가보는 것…… 조금씩 어쨌든 그쪽으로 가보려고 애쓰는 것. 사람은 9년 동안 이쪽에서 애써도 보람이 없는 경우도 많지만 이런 노력은 꼭 보답을 받기는 한다. 다시 누군가 내게 물었다.

“꼭 그런 것까지 노력하며 살아야 하니?”

물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상처를 받고, 생명이 가득 찰수록 상처는 깊고 선명하다. 새싹과 낙엽에 손톱 자국을 내본다면 누가 더 상처를 받을까. 아기의 볼을 꼬집어 보고 노인의 볼을 꼬집어 보면 누구의 볼에 상처가 더 깊이 남을까? 생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더 나은 것을 위해 몸을 바꾸어야 하는 본질을 가졌기에 자신을 굳혀버리지 않고 불완전하게 놓아둔다.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그러니 살아 있는 것일수록 상처는 자주 일어나고 그리고 깊다. 상처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 살아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 싫지만 하는 수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그것을 껴안고 또 넘어서면 분명 다른 세계가 있기는 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상처는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상처를 버리기 위해 집착도 버리고 나면 상처가 줄어드는 만큼 그 자리에 들어서는 자유를 맛보기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특별한 신의 축복이 아닐까도 싶다. 내 친구가 이 여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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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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