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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13 19:16 수정 : 2008.08.13 19:26

제제는 울지 않아, 이제 변한 거야

[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2002년 여름 니스에선 철없이 자지러졌지만 2008년 여름 제주에선 엄마를 위로하네

1. 2002년 7월 프랑스 남부 니스
- 제제 4세

2002년 여름, 당시 독일에 체류하던 우리 가족은 프랑스 남부의 한 작은 호텔에 도착했다. 막내 제제는 하루 종일 물놀이를 했다. 그러더니 저녁 무렵 약간 다리를 절룩이기 시작했다. 수영을 너무 많이 해서 근육이 무리를 한 정도로 여기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 저녁을 보냈다. 어둠이 짙어지자 제제는 더 많은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리가 아니라 엉덩이뼈까지 움직일 수가 없어졌고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울었다. 하는 수 없이 119 구급대 (프랑스 말로는 뭐라고 하나?)가 호텔에 도착했고, 우리 가족 모두는 난생 처음 제제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니스의 큰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가 넘어 있었고 그때부터 검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여의사와 나와 제제를 사이에 두고 영어로 대화를 했다. 아이를 낳아본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젊은 여의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몹시 신경이 거슬린 듯 짜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우리에게 (거의 인종적 편견이 느껴질 정도로) 불친절했다.

우는 아이에게 협박하던 프랑스 여의사

프랑스 여의사 : 아이에게 통역하세요. 당장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치료해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겠다고 .

나: 제제야 너 자꾸 울면 저 아줌마가 너 안 보내주고 여기서 게속 치료할 거래.

아이는 그 말을 듣자 겁먹은 표정이 되더니 겨우 울음소리를 낮추었다. 여의사는 자신의 협박이 잘 먹혔다는 듯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피를 뽑고 혈압을 재는 검사가 시작되자 제제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우선 엑스레이를 찍으려고 아이를 커다란 엑스레이 판에 눕혔다. 제제는 큰 소리로 울어대며 내 옷자락을 잡았다. 당시 열리던 월드컵의 응원소리보다 더 큰 소리였다. 푸른 눈과 금발의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아 나도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는데 제제가 울음 속에서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이게 뼈만 찍는 기계라구? 거짓말 마! 저 아줌마 (프랑스 여의사) 못되게 생겼던데, 엄마가 몰라서 그러지 … 저 여자가 저 기계로 내 뼈만 뽑아가려는 거야, 엉엉.”

겨우 아이를 달래 엑스레이를 찍고 나자 의사는 아무래도 고관절 탈구인 것 같으니 수술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 형과 누나는 어릴때부터 병원에 가서도 칭찬을 들을 정도로 참을성이 강했는데 막내 제제는 어찌된 일인지 몸에 조그만 가시 하나만 있어도 칼에 찔린 듯 비명을 질러댔다. 주사기 바늘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예전에 병원에서 울고 불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 “대체 부모가 평소에 어떻게 교육을 한 거야” 하는 생각에 거만하던 나는 제제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노고에 연민을 보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제는 울지 않아, 이제 변한 거야
그때가 마침 월드컵 기간이어서 유럽 전역에서는 동양인만 보면 “당신 한국인이냐?” 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 보여 줄 정도로 한국의 이미지가 아주 대단했는데, 제제는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이 피땀을 흘려 높여 놓은 국가의 좋은 이미지를 다 깨버릴 듯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와중에 나는 누군가 물어보면 정말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하나, 뭐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엑스레이를 판독하는 동안 급한 의사가 수술 준비를 위해 아이의 똥꼬에 관장액을 넣었다. 나는 아이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변기를 가져다 댔다. 제제는 통증을 참으며 내 손길을 뿌리치고 자꾸만 바지를 도로 올렸다. 제제와 승강이가 몇 분 계속되었다.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변의를 참기는 힘들었을 텐데 제제는 그 와중에 바지춤을 잡고 내게 소리쳤다.

“여기서는 싫어. 챙피하잖아. 화장실에 데려다 줘!”

엑스레이 판독결과 : 문제는 응가였음

커튼이 쳐진 응급실이었지만 나는 순간 더는 제제의 바지를 억지로 벗길 수가 없었다. 아이의 자존심을 이해해주고 싶어 의사에게 달려갔다. 휴가철,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신음을 뱉고 있는 응급실을 이리저리 뛰고 있던 의사는 내가 아무래도 아이를 화장실에 데려다 주어야겠다고 말하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침상용 변기는 어른도 쓰는 건데 ….”

의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내게 화장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팔에 링거가 꽂혀 있는 아이를 나 혼자 데리고 갈 수가 없다는 거였다. 프랑스 의사는 하는 수 없이 링거병을 들고 화장실까지 따라오고 나는 제제를 안고 가서 화장실 변기에 앉혔다. 그러자 제제가 다시 소리쳤다.

“엄마도 나가! 아줌마도 나가 ! 문 꼭 닫고 나가!”

프랑스 여의사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화장실 문 밖에서 링거병을 들고 아이가 변을 다 볼 때까지 -방귀소리와 응가가 터지는 소리가 쁑쁑거리는 화장실 문 앞에서 -서로 외면하며 기다렸다. 응가를 마친 제제는 응가를 마치고는 더 울지 않았다. 그러고는 내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엄마 시원해 … 이제 덜 아파.”

그때 엑스레이 판독 결과가 나왔다. 고관절 및 어떤 뼈에도 이상 없음. 문제는 응가였다. 너무 심하게 놀아 순간적으로 장이 꼬였고 가스가 차올랐던 것이 원인이었다. 프랑스 의사는 어이없는 표정이었고 내가 -그녀가 치료를 해 준 것은 아니지만 -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는데도 거만한 표정으로 우리 가족을 외면하고 있었다. 어쨌든,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2. 2003년, 2004년, 2005년 봄 여름 가을 겨울, -제제 5세, 6세 7세

제제는 몸이 좀 아프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울고 자지러져서 아이를 봐주시는 아주머니와 나는 낮에는 동네 소아과로 밤에는 분당의 큰 병원 응급실로 계절에 한 번씩은 뛰어가야 했다. 아주머니와 나, 그리고 제제의 형과 누나는 이제 제제의 엄살에 놀라지도 않았다. 가끔은 비타민을 약이라고 주기도 했다. 제제는 약을 먹고 나서 가끔 내게 하겐다스 아이스크림 같은 고가의 간식을 요구했다.

“참을 만 하다”는 말에 이번엔 내가 울다

3. 2008년 8월 제주 서귀포 -제제 10세

첫날 제제는 수영장에서 열렬히 놀았다. 저녁을 먹고 큰딸아이와 나는 룸서비스로 생맥주를 시켜 시원하게 한잔하고 있었다. 제제는 잠이 안 오는 듯 뒤척이더니 작은 소리로 “엄마 배 아파” 하고 말했다. 난데없이 2002년의 프랑스 니스와 기타 등등의 사건들이 내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불을 더욱 어둑하게 하고 제제의 배를 건성으로 쓸어주며 이제 다시 속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얼른 자, 코 자고 나면 다 나을 거야”

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이제 저 녀석이 더 이상 에미를 겁주지 않는군, 하며 한편 흐뭇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며 생각하는 몇 가지, 큰 아이야 이제 성년이니 그렇다 쳐도 둘째 둥빈이가 아프다고 하면 그건 정말 아픈 것이니 조금만 아프다고 해도 더 보지 말고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제는 웬만히 아프다고 하면 다 엄살이라는 것이 내 경험이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 경과했을까, 딸아이와 나는 얼큰한 생맥주에 알딸딸한 기분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자는 줄만 알았던 제제의 침대 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엄살을 모른 척하고 자려고 하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몸이 피곤했다. 억지로 일어나 불을 켠 순간 아이의 몸이 퉁퉁 부어오른 것이 보였다. 아이는 두 시간이 넘도록 “그냥 자면 낫는다” 는 엄마의 말을 지키려고 그 고통들을 견디고 있었건 거였다. 나는 호텔에 연락을 했고 또다시 119 구급대(이건 한국말로 정말 119다)가 왔다.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우리는 서귀포의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아이의 혈압은 39로 떨어져 있었다. 병원을 지키는 젊은 의사는 아주 친절했다. 피를 뽑고 혈압을 재고 주사를 여덟대나 맞는 동안 제제는 미안해하는 내게 말했다.

“괜찮아 엄마, 참을 만 해!”

내가 늘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동안 아이는 변하고 성장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울었다. 미안해서였다. 10년 동안 제자리에 있는 생명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민주주의든 그것이 아이든 국민이든 말이다.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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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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