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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03 19:01 수정 : 2008.09.03 22:03

[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남에게 시비 걸고, <정읍사>를 외우고, 집을 잃고… 비 오는 날 떠올리는 그들의 행적

지난 월요일에는 비가 내렸다. 9월의 첫날이어서 가뜩이나 기분이 싱숭생숭거리고 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휴대폰 안에서 딩동댕동 뇌성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한겨레 원고를 쓰려고 하루를 온종일 시간을 비워두었는데 번개치는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도저히 글씨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원고 쓸 시간에 결국 술 약속을 잡고 말다

결국 나는 술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서고 말았다. 장대비처럼 내리는 빗속을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약간 내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술 먹는다고 이명박 정부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세계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노다지를 캔다고 원고도 안 쓰고 나는 이 저녁에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길을 나서는지 말이다. 그런데 걸어가면서 얼핏 보니 버스 정류장 가는 길의 술집들이 이른 저녁부터 북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나보다 더 빠른 강적들이! 하는 생각에 우산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엿보니 벌써 빈 소줏병들 두 어 개가 탁자마다 놓여 있었다. 참 이상하다. 그때 왜 내 마음은 살짝 흐뭇했을까.

오해가 있을까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리 많이 마시지는 못한다. 누구는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술자리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술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술을 좋아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술자리에 별로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마시는 장소를 옮긴다. 말하자면 누군가 특별히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말을 비틀기 시작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예전에 그런 사람을 붙들고 그런 게 아니라고 뭔가 저를 오해하신 거 같다고 밤이 새도록 내가 술값까지 내 가면서 그 사람에게 올바른 정신을 심어보겠다고 노력한 날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자꾸 지난날을 돌아보고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나이 드는 증거라고 하던데 흠….

아무튼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조심스레 엠(M·편의상 엠 기자라고 부르자)과 저녁을 하면서 술을 한잔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엠 기자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던지라 흔쾌히 그러마고 하니까 친구가 약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약속장소로 나가니까 엠 기자가 와 있었다. 여기저기서 칭찬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소주를 좋아하는 거며, 생각하는 거며, 남 흉보는 거 좋아하는 거며 나와 비슷한 점이 아주 많았다. 우리는 왜 이제야 만나 이제사 술을 마시나 하고 다음번에 만나 또 술을 마실 것을 약속하고는 나와 엠 기자를 연결해준 친구에게 동시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친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니들 정말 생각 안나니? 지난번에 엠 기자가 난데없이 술자리에 끼어들어서 지영이 너한테 시비 거는 바람에 지영이 네가 ‘뭐 이 세상에 이렇게 세계관 다른 사람이 다 있어?’하고는 성질부리면서 그냥 집으로 가버렸던 거? 니들 오늘 초면이 아니야. 그리고 그게 오래전도 아니고 불과 일주일 전이야.”

순간 엠 기자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주 오래된 꿈처럼 희미하게 기억들이 살아나기도 했다. 엠 기자도 그런 거 같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엠 기자와 나는 술자리에서 일어났던 일은 잘 잊어버리는 것까지 닮은 모양이었다.

분위기 잡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번개탄’

술버릇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람마다 술버릇은 정말 가지가지인가보다. 젊었을 때는 술 먹고 시비 거는 사람은 물론이고 술 먹고 우는 남자친구들이 정말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가 우리에게 지워놓은 짐이 무거웠고 그 개인들의 젊음이 버거워서 그랬다 싶기도 한데 그때는 일단 그런 친구들하고는 술자리를 피해버리곤 했다. 가끔 내게 술을 사주던 선배 하나는 함께 술을 마시다가 누군가에게 취했다, 그만 마셔, 하는 경고를 들으면 자기의 정신이 얼마나 멀쩡한가를 증명하기 위해 <정읍사>를 외우곤 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추오시라 어긔야 어걍도리 아으 다롱디리….”

처음에는 그것이 정말 신기해서 저 선배가 술이 취하지 않았구나 생각하고 그의 술 실력에 약간 경의까지 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국문과 강의에 리포트를 내야 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절, 급하게 <정읍사>의 가사가 외워지지 않아서 그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그 가사를 불러달라는 내 요청에 선배는 우물거리며 당황해했다. 그러더니 지금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좀 있다가 전화로 그것을 불러주겠다는 것이었다. 한시간쯤 더 지나도 전화가 오지 않아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데 드디어 전화가 왔다. 아까와는 달리 묘하게 목소리가 꼬부라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배는 술에 취해야만 그것을 외울 수가 있어서 이 후배에게 그것을 들려주기 위해 급하게 가게로 뛰어가 깡소주를 두병이나 먹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선배가 자기가 취하지 않은 증거로 <정읍사>를 읊기 시작하면 빨리 집에 보내야 된다는 것도. 그런데 술을 먹고 약간 꼬부라진 혀로 발음하는 어긔야 어걍도리 아으 다롱디리.....라는 후렴은 묘하게도 술자리와 잘 맞아 떨어져서 나는 가끔 그 선배를 생각하면 그 발음이 조금 그립기도 하다.

술자리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내 여자친구도 있다. 이 친구는 별명이 번개탄이다. 말하자면 술자리에서 이 세상 술은 혼자 다 먹을 것처럼 분위기를 잡고 자기는 언제나 슬그머니 도망을 가버리는데 그 이유는 언제나 오늘 ‘시댁제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술자리에서 남편에게 전화가 오면 그녀는 언제나 예쁜 목소리로 “응 자기야 나 지금 2호선 전철 안이야” 한다. 어떤 때는 자기가 2호선 전철 안이라고 한 것도 잊어버리고 한 시간 후쯤 남편에게 다시 전화가 오면 술자리에서의 게걸스러운 목소리를 얼른 바꿔서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하곤 한다.

“응 자기야 오늘따라 전철이 많이 밀리네.”

아마 그녀는 오늘도 어디선가 남들에게 분위기를 잡아 술을 마시게 해놓고 자신은 시댁 제사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2호선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겠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내 친구의 남편의 술버릇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람 역시 “다 좋은데 술만 먹으면” 의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은 술만 먹으면 집을 잃어버린다. -술만 먹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집을 찾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이겠다 - 친구는 결혼 후 그 남편 때문에 -정확히는 술만 먹으면 집을 못 찾는 증후군 때문에 - 고생을 많이 했다. 그중의 하이라이트는 이것이다.

“글씨나 간판? 미쑈… 당기쇼가 보여”

하루는 남편이 혀가 잔뜩 꼬부라져 전화를 해서는 집을 찾지 못하겠다고 했단다. 친구는 노련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일단 주변에 보이는 간판이나 글씨를 불러봐 내가 그럼 데리러 나갈게.”

그러자 한참 후 몹시 애를 쓰는 듯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다른 글씨는 안 보이고 미쑈 가 보여.”

역시 노련한 친구는 오랜 세월 단련되어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미쑈? 미쑈가 어디 있지? 여보 그러지 말고 ....그 주변에 다른 글씨는 없나 찾아봐 잘 찾으면 보일 거야 뒤돌아서 다시 봐봐 응?”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그러자 남편이 조금 후 다시 대답했다고 한다.

“여보........ 미쑈,....... 뒤에 당기쇼가 보여..........”

노련한 내 친구는 여기서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남편은 술집 문을 잡고 전화를 했던 것이다.

친구들은 가끔 내게 말한다. ‘너 지금 내가 하는 말 소설에 쓰지 마!” 나는 결코 소설에 그 말을 쓰지 않았다. 이건 수필이니까 . 험! 그런데 혹시 이제 아무도 나와 술 마시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니겠지.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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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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