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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런 거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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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나이 들어도 없어지지 않는 남 탓하는 버릇들 …얘들아, 이게 다 엄마 탓이라구? 지난번 연재에 ‘같은 이야기만 20년째’라는 칼럼이 나간 뒤 나는 <한겨레>의 이 연재를 꽤 많은 사람이 관심 있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 이제서야 말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 친구들과 만날 일이 유난히 많았는데 술을 마시다가 한 사람씩 ‘슬며시’ 내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지영아 저번 쓴 연재 말이야, 그 친구가 그러니까 혹시 … 나 아니니?” 처음에는 “아니야, 그럴 리가. 그거 너 아니야’ 하다가 말았는데 모임마다 한두 명씩 꼭 ‘슬며시’ 다가와서 “그거 혹시 나?” 하고 묻는 소리를 들으니까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글로 콕 찍어 놓으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게 자기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마음에 걸리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글로만 이러면 좀 나은데 말로도 그걸 잘한다는 거다. 그래서 예전에 어떤 친구는 “네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소리를 하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하면 꼭 자기 흉을 보는 것 같아서 뜨끔한다는 것이다. 슬며시 다가와 한결같이 묻는 질문 하지만 조금 더 사귀어보면 사실 이런 말도 해줄 수 있다. 나 역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예전에 술버릇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끝이었는데 자기가 술 취했을 때 버릇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각자 상대방의 흉을 유쾌하게 보며 깔깔거리던 자리였다. 나는 술을 먹고 약간 취하면 “나 졸려, 이제 집에 갈래” 하고 벌떡 일어나 나와서 누가 뭐라고 설득을 해도 기어이 집으로 가는 이상하고 유명한 술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친구의 말은 좀 달랐다. 내가 그렇게 취하기 조금 전,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 집으로 가기 조금 전의 버릇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하던 말을 또 하고, 하던 말을 또 하는데 문제는 그게 혼자가 아니라는 데에 특이성이 있었다. 그 장면을 살짝 중계하자면 이렇다.
나: 너 고등학교 어디 나왔다고 했지?
친구 ㄱ: 나 광주 출신이야.
나: 아, 그래? 너 그럼 ㄴ 알아?
친구 ㄱ: 알다마다! 친한 사이인걸 … 걔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내가 닷새나 그 집에서 밤샜잖아.
나: 그래? 그럼 우리 그때 봤을 수도 있네. 나도 그때 광주까지 내려가서 문상했는데.
친구 ㄱ: 그래? 왜 내가 너를 못 봤을까? 이 대화가 한 다섯 번씩 오고 간다는 것이다. 다들 취해 있어서 누가 세 번씩 이야기를 하든 다섯 번씩 이야기를 하든 상관하지 않는데, 기억력이 좋은 친구는 그날 하필이면 몸이 아파서 술을 먹지 못하고 있다가 이 광경을 목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다음날 점심식사 자리에서 내가 친구 ㄱ을 만나더니 다시 묻더라는 것이다. “너 고등학교 어디 나왔다고 했지?” 그러자 친구 ㄱ은 태연하게 “응 나 광주 출신이야” 했고 나는 마치 모든 것을 처음 듣는다는 듯이 놀라며 “그래? 그럼 ㄴ 알아?” 하자 친구 ㄱ은 더욱 놀라며 “아니 네가 어떻게 ㄴ을. 그럼 그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 하며 여섯 번째를 반복하는데, 어제 술자리에서 멀쩡한 친구 보기에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물론 나와 ㄱ은 그 어떤 것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20년째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그 친구에게 내가 너무했나 하는 마음이 이제야 든다. 어른들 말씀이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 하셨는데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기 싫고 입은 자꾸 열리니 참 이것 또한 큰일이긴 하다. 갈수록 지갑은 열기 싫고 입은 자꾸 열리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입이 열리되, “제 탓입니다.” “제 불찰입니다.” 이러면 좋은데 그것 또한 거꾸로 간다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유머는 지구본 유머다. 아시는 분 많겠지만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어느 학교에 장학사가 시찰을 나왔다. 과학실을 시찰하던 장학사는 23.5도가 기울어져 있는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척하고 있는 학생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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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런 거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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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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