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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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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구치소 교화위원 하며 규칙에 대해 고민하지만 재벌,공무원 범죄 보면서 “법 지키라” 말 안 떨어져
어릴 때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아현시장에 가는 길, 엄마는 대충 좌우를 살펴보고 찻길을 건넌다. 물론 60년대 말 다니는 차가 그리 많을 리가 없다. 하지만 6살 즈음의 나는 얼른 엄마 손을 놓고 날아가듯 뛰어 육교를 올라간다. 육교 위에서 바라보면 엄마는 느긋하게 찻길을 건너 육교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엄마의 손을 잡는다. 그러면 엄마는 말한다.
“엄마 손 잡고 찻길로 건너지, 뭐하러 힘들게 육교로 가니?”
규칙을 지켜봤자 나만 손해라는 뿌리 깊은 불신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도 참 이상하다. 어떻게 아이에게 태연히 범법 행위(?)를 연출하면서 심지어 나처럼 하라고 타이르기까지 할 수 있단 말인지. 그렇다고 우리 어머니가 길거리에 휴지를 버리거나, 불법 투기를 하거나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집안에는 늘 강박적일 만큼 규칙과 규율에 대한 금과옥조가 있었다. 우리 집은 실은 공자의 집안인데 내가 보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자손에 가깝다. 아무튼 늘 법은 법이고, 그것은 지켜야 하며, 그것에 항의하는 것은 허용되었어도 어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담배를 좋아하지만- 금연 팻말 밑에 숨어서는 담배 한 대도 못 핀다. 몇 번 그러려고 해봤는데 가슴이 너무 뛰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좋지 않아서 한때는 큰 무리 없이 적당히 넘어가는 사람들을 배우려고 열심히 그들을 관찰한 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뭐 그저 내 팔자려니 하고 산다.
아무튼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새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거의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현시장에 매일 갔다. 우리 식구는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 봉순이 언니까지 모두 여덟 명에, 자주 집에 들르던 삼촌과 이모들 그리고 돌아오는 제사까지 … 엄마의 장바구니는 언제나 무거웠다. 어머니가 평생 내 앞에서 유일하게 저지르던 범법을 이해하려면 그 장바구니의 무게를 생각하면 되려나? 맙소사 근데 생각해 보니 그때 우리 엄마의 나이 서른다섯… 내가 지금 ‘아그들’이라고 귀여워하면서 “괜찮다, 니들이 아직 어려서 그렇지” 하고 대충 모든 걸 용서해 주고 마는 그 후배들 나이다.
우리 엄마 흉까지 보면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규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벌써 서울 구치소 교화위원으로 구치소를 들락날락(?)한 지 5년이 넘어간다. 내가 만나고 있는 사형수들은 이 ‘깃털’의 열심한 독자들이다. 이 ‘깃털’을 처음 시작한 다음 그들을 만나러 갔더니 그중 한 명이 대뜸 한다는 말이 “에궁, 막내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렇게 사생활 다 드러내고 이제 어쩔 거예요?” 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사생활은 깃털보다 복잡한데요” 하고 받으니 싱글벙글 웃는다. 내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인사가 겸연쩍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내가 가장 놀란 사실은 그들이 “그저 나쁜 사람”들이라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규칙을 지키는 것을 어려워했고 거부하곤 했다. 왜냐하면 “그래 봤자 나만 손해이고 어차피 이 세상은 그것을 지키지 않고 사는 놈들에게 훨씬 유리한”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뿌리 박혔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들은 이곳에 와서 교화위원들을 만나기 전에, 아니 어쩌면 지금도, 가진자들에게도 슬픔과 기쁨과 절망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돈이 있으면, 권력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유명한 말을 더 하지 않아도 되리라. 실제로 삼성특검의 결말이나 땅투기가 드러나자 “나는 땅을 사랑할 뿐”이라는 말을 하는 분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얼치기이긴 하지만 소위 교화위원으로서 그들에게 가서 “그래도 당신들은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하고 말하기가 괴롭다. 이 모든 일들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교묘하고 복잡하고 섬세하고 확고하게 모든 이들에게, 특히 정서적으로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는 약한 영혼들에게 스며든다. 나는 구치소에서 그 사람들을 만나며 앞으로 수많은 ‘묻지마 범죄’가 일어날 것을 예견했다.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바보가 아니면 그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시원 사건 용의자 보면서 〈우행시〉 주인공 떠올려
오래된 일이지만 우리 둘째가 초등학교 때 심술궂은 담임선생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아이를 시도 때도 없이 때렸다고 했다. 예를 들어 반이 중간고사에서 꼴찌를 하면 그 애를 불러다가 혼을 내고 자기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트집을 잡아 그 애를 괴롭혔다고 했다. 내가 그 일을 안 것은 그 학년을 마칠 무렵이었는데 우리 아이가 무슨 집단 시위를 주동했다고 선생이 전화를 해서 알게 된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생각해낸 것이 선생이 이유 없이 그 애를 혼내고 괴롭힐 때마다 책상을 두들기며 항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둘째에게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엄마에게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둘째는 태연히 대답했다.
“엄마가 알면 일이 커질 것 같고, 그러면 나만 피곤해져.”
우리 둘째나 아이들이 두둔해준 그 아이는 그나마 함께 섞여 밥도 먹고 공도 차 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같은 책상에 앉은 넓은 평수에 사는 우리 둘째가 수업시간에 운동장을 공허한 표정으로 내다보는 것을 보며 그 아이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얘는 엄마가 유명한 소설가인데도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있나 보다 … 그러니 얘도 슬플 때가 있구나.”
우리 둘째는 그 아이를 보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이 없지만 공을 찰 때는 멋진 녀석이구나.”
이제 가난한 자와 부자들은 구획별로 나누어져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이번 고시원 사건의 피의자가 “나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인간”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들으며, 내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모델로 삼았고 지금은 처형되고 없는 김용제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는 딱 요맘때인 1991년 여의도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던 어린이들을 무차별하게 치어 11명을 살해하고 21명에게 중상을 입힌 다음 태연하게 “더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라고 말한 그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 감기로 약을 잘못 먹고 약시가 되어 취직 자리에서만도 한 해에 20번씩 쫓겨났다. 그 역시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고 무수히 말했었다. 구치소에 들어와 그에게 처음으로 정밀 시력을 측정하고 안경을 맞추어 준 수녀님 앞에서 그는 “아! 보여요.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대접받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를 보살피던 수녀님은 그를 붙들고 우셨다. “내가 더 일찍 너를 찾아내 보살펴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면서 말이다.
그 사람 너무 회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달 6일에는 살인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과 용서를 다룬 다큐멘터리 <용서>도 개봉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분들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솔직히 너무 가슴이 아파서 아직도 그분들을 뵙는 것이 너무 힘들다. 죄 없는 신부님들과 성직자들, 훌륭한 봉사자들이 그들과 함께 울어주느라 눈이 짓무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분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숙연해져서 아아, 잘 살아야지 싶은데, 얼마 전 구치소에서 한 신부님이 나를 붙들고 연쇄살인자 Y씨에게 계속 편지를 한다고 하셨다. 순간 이 모든 결심도 잊고 나는 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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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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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은 나랑 동갑인데도 무섭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그럼” 하신다. 나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신부님, 그 사람은 너무 회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냥 신부님하고 수녀님이 특별 면담만 했으면 좋겠다.”
나는 물론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지고 교화위원증을 반납할 용의도 있다. 나는 “아직은 물러나지 않겠다”라는 말로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 않으니까.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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