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7년 5월14일 은진중학교 봄 소풍 때 북간도 명동촌 입구의 선바위 정상에서 장공 김재준(뒷줄 양복 차림 두 사람 중 오른쪽) 선생과 찍은 기념사진. 선바위는 당시 용정 일대에서 최고 명소로 꼽히던 원족 장소의 하나였다. 김재홍씨 제공
|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5
북간도 용정의 미션 스쿨인 은진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 내 평생의 스승인 장공 김재준 목사(1901~1987)를 처음 만났다. 김재준 목사는 평양의 숭인상업학교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사표를 낸 뒤 막막한 실직 상태에 있었다. 그때 마우리 선교사의 소개와 학교 이사장이었던 나의 아버지 문재린의 강력한 추천으로 은진의 교목이자 성경 교사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6살 아래인 그를 같은 함경도(경흥) 출신이기도 해서 유학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그는 수줍음이 많은 성품이어서 바닥과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강의를 했다. 학생들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를 천지(天地)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강의는 항상 충실하고 새로운 것이어서 큰 존경을 받았다.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나에게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한번은 한경직 목사(1902~2000)를 초빙하여 학교 학생들에게 신앙강좌를 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영락교회 목사와 숭실대학교 학장이 된 한 목사는 그때 우주 만물의 질서정연함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처음 만난 김 목사와 인연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더 가깝게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에는 운동과 음악에 몰두를 하느라 종교부 활동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시무하던 용정 중앙교회에서 성가대원과 주일학교 교사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과 용정 근처의 촌락에 가서 주일학교를 열고, 교회까지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주변촌락운동을 벌였다. 나보다 네 살 위인 강원룡(1917~2006)은 당시 학생회장을 맡았는데 매우 활동적인 성품이어서 김 목사의 지도에 따라 종교부 활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연극에 주연을 맡기도 했다. 한번은 수학 선생이 기하학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 절절 매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풀어준 적이 있다. 나는 사실 문과보다는 이과가 적성에 맞았는지 수학과 과학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가만히 문제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환히 통달을 할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복도에서 창문 너머로 본 강원룡이 “문 목사가 똑똑한 아들을 두었군!” 하고 큰 소리로 외쳐서 모두들 웃었다. 그는 해란강 건너 일송정 아래 있는 용강동에서 주일학교와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 때 같이 교사를 했던 여성과 결혼을 했다. 이때 같이 활동한 종교부원으로 훗날 한신대 교수가 된 안병무도 있었다.
|
문동환 목사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