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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신학교 유학시절인 1940년 한 살 아래로 청산학원에 다니고 있던 안병무(맨오른쪽)와 함께 한 필자(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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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의 떠돌이 목자의 노래 2-1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나는 아버지 몰래 신학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했다. 일본신학교에 입학하려고 주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때 나는 훗날 서울에서 종로서적을 경영하는 장하구 형과 같이 자취를 했다. 장형은 상지대학 독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 책상에 엎드려서 기도를 드렸는데,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신실한 분이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신쥬쿠라는 곳에 있는 한인교회에 같이 다니면서 내가 신학교에 입학해 갈라질 때까지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고마운 편지가 날아왔다. 용정 중앙교회에서 내게 장학금을 대주기로 했으니 원하는 신학 공부를 마음껏 하라는 것이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니! 아버지는 내 심정을 아시고 이렇게 일을 만들어 주신 것이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해결이 되었는데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공부를 하다가도 두통이 나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경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전철을 타고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일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컸던 나는 빽빽한 승객들 틈에 서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그때 다시 두통이 엄습해 왔다. ‘하나님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하는 나를 왜 이렇게 돌보시지 않느냐 말이야!’ 나도 모르게 버럭 성을 냈다. ‘이제 난 모르겠습니다. 이 몸은 당신에게 바친 몸, 미치게 하든지 말든지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누가 내 머리에 시원한 계곡물을 한 바가지 퍼부은 것 같았다. 그 차가운 느낌이 머리끝에서 시작돼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발가락 끝으로 쑥 빠져나갔다.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두통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일본신학교 예과 1학년에 입학한 나는 본과 2학년생이었던 익환 형과 함께 기숙사에서 지냈다. 형은 특히 구약에 관심이 많았다. 구약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신화도 있고 여러 가지 문서들이 혼합되어 편찬된 것이라는 교수의 말에 형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굉장한 논쟁을 벌였다고 했다. 나 역시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요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도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오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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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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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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