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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형 익환(왼쪽)은 유엔군 참전을 끝내고 복학해 나와 함께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다녔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우리 형제의 후견인 노릇을 했던 고든 스코빌 목사 집에서 함께한 나와 익환 형. 스코빌 목사는 우리 아버지의 스코틀랜드 유학시절 동문으로 우리 형제의 미국 유학을 내내 돌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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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4-1
1951년 8월말 부산항에서 내가 탄 배는 미군의 군수물자를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빈 화물선이었다. 내 보스톤 가방에 든 것은 성경과 영한사전, 런닝과 팬티 한 벌식, 그리고 쓰다 남은 두루마리 휴지 한 개, 친구들이 준 태극기가 전부였다. 나는 위 아래 색이 다른 양복을 입은 초라한 피난민의 모습이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식당에 산처럼 쌓여있는 갖가지 음식이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처음 보는 음식과 과일을 어떻게 먹을지 몰라 남들을 보면서 따라 먹었다. 북태평양의 한가운데, 날짜 변경선을 지날 즈음의 바다는 정말 거울처럼 맑고 잔잔했다. 파도 하나 없이 고요한 바다를 보니 태평양이라는 이름이 왜 지어졌는지를 알 것 같았다. 약 3주가 지나자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다리(금문교)가 보였다. 배는 마침 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 다리를 통과했다. 천상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아름다웠다. 내 가방을 열어본 세관 관리는 “미국에는 어디 가든지 이런 휴지있어요.”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대학은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 익환 형이 얻어준 장학금은 학생회에서 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학부 2년 동안 받았다. 내 모습이 영 불쌍해 보였던지 학생회에서 새 양복을 한 벌 사주기도 했다. 어학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어떤 교수들은 억양이 독특해 강의를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졸업할 때가 다가오자 맥콤 교감은 뉴저지주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선해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형이 다닌 학교이기에 선뜻 그곳에서 석사과정을 밟기로 했다. 학교 규모가 큰 탓에 프린스턴의 사람들은 웨스턴 때만큼 살갑지는 않았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잘 정돈된 잔디가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학생회에서는 나를 외국학생 대표로 임원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나는 그때 브라질에서 온 조셉 보노반투라(Joseph Bonovatura) 목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미국 여자는 여자 같지 않다’며 브라질에 오면 내게 매력적인 브라질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대학원에서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예수의 신성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신약을 공부했다. 그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서기 100년께 쓰인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 자신이 아니라, 요한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릴리 청년 예수를 신격화한 것은 그를 숭상한 제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의심의 구름이 한 순간 사라졌다. 참전해서 동경에 있는 유엔군 극동사령부에서 통역으로 일을 하던 형이 54년 다시 프린스턴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교회에 다니고 영화도 보러 다녔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둘이 이중창으로 성가를 불러서 그 녹음판을 서울 집에 보내기도 했다. 장학금은 등록금만큼이어서 나머지 생활비와 기숙사 비용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야 했다. 나는 평소 식당에서 일하다가 방학 때가 되면 호텔에서 보조 요리사로 일을 하기도 했다. 주인은 러시아 출신 유태인으로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왔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친절하게 해 주었다며 내게도 잘 해주었다. 나는 특히 스크램블드 애그를 보들보들하게 잘 만들어서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아침 식사 담당 요리사를 맡으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지금도 아내를 위해 스크램블드 애그는 꼭 내가 만든다. 55년 봄, 형은 건강이 나빠진데다 가족들과 함께 하기 위해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코네티컷주에 있는 하트포드 신학대학으로 옮겼다. 이곳은 기독교 교육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아내를 만났다. 미국 유학생활은 평화로웠지만 우리 형제에게 그다지 편할 수만는 없었다. 폐허가 된 고국을 생각하면 미국의 풍요로움이나 안락함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명동촌에서 배운대로 민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너무 큰 부분을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까? 예수의 신성 문제가 해결 되자 나는 앞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서 뭘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보산소학교, 명신여학교, 장단중학교, 대광중고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신역에서 보았던 비참한 농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때, 교육과 신학을 결합시키자. 제대로 교육받은 목사와 교사가 짝이 되어서 농촌으로 들어가면 좋겠다. 귀국하면 단과대학인 한신대에 사범대 과정을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지금껏 농촌의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조차 하느님이 나를 쓰시기 위해 예비하신 것 같았다. 하트포드에서 나의 꿈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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