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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17 19:41 수정 : 2008.10.09 18:19

한신대의 기독교 교육학과 교수 시절, 나(뒷줄 왼쪽 세번째)는 종종 학생들과 학교 뒤 북한산에 올라 산상 명상 수업을 하곤 했다. 부임 초기 어느 날 동료교수·대학원생들과 산상 수업을 마치고 도시락 점심을 즐기고 있다.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5-3

여름방학이 되면 전국에서 교사 강습회가 열렸다. 한신대 기독교 교육학과는 이화여대 교육학과와 연대하여 대규모로 교사강습회를 열곤 했다. 나는 새로운 기독교 교육 방법론을 소개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특강을 했다. 신혼에 혼자 남겨둘 수 없어 아내도 같이 다니곤 했다. 한번은 한탄강 가에 있는 수양관에서 기독교 교사협회가 주관한 퇴수회가 열렸다. 마침 만삭인 아내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같이 갔는데, 귀한 손님이 왔다며 주최 쪽에서 ‘날달걀’을 내 왔다. 그 자리에서 톡톡 까서 마시는 내 모습에 아내는 기겁을 했고 그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아내는 그렇게 한국생활에 적응해 갔다.

예수교 장로회 한광옥 목사가 기독교교육협의회 총무로 있을 때 전국기독교 교육대회를 열곤 했는데, 나도 여러 차례 주제 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이화여대 운동장에서 대규모 대회를 열렸는데,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장인 박정희가 축사를 하겠다고 집회에 왔다. 강단에 서 있던 나는 얼떨결에 악수를 했는데, 그의 손이 촉촉하게 젖어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나도 어렸을 때 교회에 다녔지만 나에게 만큼은 주일학교가 실패를 했다. 여러분들은 주일학교를 잘 하시길 바란다”는 내용으로 축사를 했다.

나는 기독교 교육에서 이론적인 공부뿐 아니라 실습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실습 지도를 철저히 시켰다. 학생들에게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과 생활한 일지를 꼼꼼하게 작성하도록 해 그것을 일대일로 검토했다. 나는 주입식 강의보다는 공동학습을 함께 지도했다. 그리고 한 교과과정을 마치면 퇴수회를 열어서 사전계획과 사후평가까지 반드시 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어린이들의 발달 단계와 심리에 대한 이해 없이 제대로 된 기독교교육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어린이들에게 부정적인 명령을 하는 교육보다는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하고 스스로 자아를 확립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실 이전의 주일학교 교육이란 권위주의와 주입식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가르치려고 끊임없이 애썼다. 그래서 학생들은 나를 ‘생의 놀라운 변화를 일깨워준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생의 놀라운 변화를 겪은 학생들은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69년 초 서울 성동구 내곡동에 있는 대왕국민학교에서 미감아 아동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 근처에는 완치된 한센병 환자들과 가족들이 모여 사는 에틴져 마을이 있었다. 에틴져 마을 아이들 다섯이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학부모들은 “내 아이를 문둥이 자식들과 함께 교육시킬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문교부에서는 학부모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학부모들의 항의는 수그러들지를 않았다. 신문에서 이 사건을 본 우리 학교 학생회 간부들은 에틴져 마을을 찾아가 자매결연을 맺기까지 했다.

속수무책이었던 문교부는 한신대에서 초등학교를 세워 미감아 교육을 맡아 달라고 제안해 왔다. 이여진 학장은 “세계기독교육 이사회의 일원인 문 박사가 어린이 교육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니 훌륭한 초등학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나를 높이 추천했다. 나도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이 편견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상적인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한 학교가 있다면 기독교 교육학과 학생들의 실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새로운 학교에 대한 여러 가지 꿈을 설계했다. 그해 가을 에틴져 마을의 미감아들과 교직원 자녀들,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자녀들이 모여 한신국민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한신국민학교는 70년대 깨끗한 학교로 크게 발전하며 지역사회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초기의 설립 과정을 모르는 이들에게 한신국민학교는 귀족적인 사립학교로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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