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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18 20:58 수정 : 2008.10.09 18:19

서울 사직동 수도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던 1969년 성찬 예배를 진행하고 있는 필자(오른쪽). 최태섭(왼쪽) 장로의 든든한 후원으로 기독교 교회 개혁에 도전하던 시절이다.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5-4

“잠깐만!”

이 말은 수도교회에서 했던 설교 제목이었다. “잠깐만! 이대로 좋은가? … 함께 생각하자, 함께 개혁하자, 우리 함께 새 삶, 새 공동체를 이룩하자.”

나는 1967년부터 74년까지 서울 사직동에 있는 수도교회의 목사로 일했다. 한신대 교수직과 병행했다. 안일한 기성 교회의 모습에서 탈피해 역동적인 교회를 만들고자 달려들었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교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실업인인 최태섭(1910~1998년) 당시 한국유리 대표이사가 장로였다. 최 장로는 양심적인 기독교 정신으로 회사를 운영해, 직원들의 진심 어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지금의 스톡옵션 같은 제도를 시행했다. 평직원들에게도 보너스를 줄 때도 주식으로 줘, 직원들이 자신의 회사처럼 느끼게 했다.

1970년대 진보적인 사회참여 기독교 운동의 중심지였던 크리스찬아카데미도 그의 후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우이동 골짜기의 땅을 기증해 강원룡 목사가 그곳에 아카데미하우스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 한신대 이사회 이사로서 학교 재정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강원룡 목사와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후원했다.

당시 한신대 학생회장이며 나를 몹시 따르던 제자 최승국은 수도교회의 청년회장이었다. 최태섭 장로의 딸 영순과 아들 영택도 한신대에서 공부를 한 까닭에 나를 수도교회로 초빙하고 싶어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수도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된 나는 장로들과 같이 동네 심방부터 나섰다. 당시 교회 근처 사직터널 위쪽에 개미마을이라 하는 곳이 있었다. 거기엔 넝마주이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같이 심방을 갔던 최 장로는 “아직도 이렇게 못사는 사람들이 있나?”라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교회를 새로 지으면서 교회 문 앞 계단을 대리석으로 반짝반짝하게 만들어놓자, 마을 사람들은 계단 앞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려고 했다. 사직동과 주변에는 그렇게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시리즈로 설교를 했다. 그 다음 주일에는 성찬식을 하면서 교인들에게 질문을 써내도록 했다. 그 질문을 토대로 다시 한번 설교를 해서 교인들과 소통하려고 애썼다. 일방적이지 않은 설교는 교인들에게 파격적이었다.


수요예배 대신에 수요강좌를 개설해 이효재 이화여대 교수, 박형규 목사, 김재준 목사와 문익환, 박봉랑 등을 초청해 사회문제나 다른 종교에 대해 같이 공부했다. ‘세상을 위한 교회’, ‘평신도 중심의 교회’라는 구호를 내걸고 실험하고 실천하려 애썼다.

문동환 목사
부목사로는 김상근(전 평통 수석부의장) 목사를 채용했다. 그는 빈틈없는 일꾼이었다. 건망증이 심하고 덤벙거리는 나를 옆에서 잘 도왔다. 한번은 내가 장준하 선생의 아들 결혼식 주례를 맡았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가서 식이 끝났던 일도 있었다. 그만큼 내 건망증은 학교 안팎으로 유명했다. 김 목사 역시 한신대에서 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리더십이 있었다. 그는 원래 기독교 대한복음교회 출신이었다.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교단인 복음교회에는 자체 신학교가 없어, 이 교회 출신 목회 지망생들은 한신대나 연세대 신학대학으로 진학을 하곤 했다. 나의 후임으로 수도교회 담임목사를 맡은 김 목사는 나중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를 비롯해, 70년대 이후 활발한 사회참여 활동을 하는 대표적인 기독교 목회자로 성장하며 나의 동지가 됐다.

나는 ‘깨어진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지게’ 이미지를 수도교회의 상징으로 만들고, 지역사회를 위한 도서관, 유치원, 다방목회, 굴다리 지역사회학교 등을 만들며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섰다. 69년에는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추수감사 주일(11월 셋째 주)을 따르지 않고, 추석 다음 주일에 추수감사 예배를 드렸다. 신앙의 토착화를 위한 시도였다.

이런 시도는 최승국·서명실을 비롯한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교회의 어른들은 교회에 와서 위로받기를 원하는데, 도전만 하니 피곤하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의 가능성과 한계를 수도교회를 통해 절실하게 맛보았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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