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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한신대 졸업식을 진행하고 있는 당시 김정준 학장(왼쪽)과 안병무 교수.(오른쪽) 필자와 의기투합해 한신대를 진보적 신학의 성채로 이끈 주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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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5-5
“본 대학 학생들이 학원 질서를 파괴한 사실이 없다고 판단하여 학칙에 의한 제적을 할 수 없음.” 1971년 10월16일 한신대 교수회의 분위기는 비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대학가에서 교련 반대 등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10월15일 위수령을 선포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주요 대학들이 군대에 점령당했다. 문교부는 전국적으로 173명의 학생들을 제적하라는 명단을 내려보냈다. 한신대에서는 추요한·이해학·김성일·황주석 네 명의 학생이 명단에 올랐다. 연세대도 버티다가 결국 학생들을 제적했다. 위수령이 나기 이틀 전 한신대 학생들은 명동 세종호텔에서 열린 기독교인 국회의원 조찬기도회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사회문제화됐다. 전교생이 200명도 안 되는 한신대는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은 학생들을 제적하라고 수차례 전화를 걸어 압박했다. 교수들은 문서로 요구하라고 버텼다. 그들도 기록이 남는 게 두려웠는지 문서로 정식 요청을 하지는 못했다. 교수회의는 거듭되는 문교부의 요구에 여섯 차례나 ‘제적 불가’ 회신을 보냈다. 청와대까지 나섰다. 문교부 쪽은 청와대가 최종적으로 정한 시한이라며 10월21일 오후 1시를 통보했다. 사회의 관심이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로 몰렸다. 마침내 10월21일 교수들은 연행에 대비해 내복까지 입고 나올 정도로 각오를 하고 아침 일찍 학교에 모였다. 안병무 교수는 수사기관에 끌려가서 당하는 인격모독을 견디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군대가 수유리 쪽으로 오고 있다고 <시비에스>(CBS) 방송이 매시간 뉴스를 전했다. 이때 학교를 출입하던 중앙정보부 요원이 교수회의실로 밀고 들어와 “교수님들 죄송합니다. 국가 원수의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라며 읍소했다.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김정준 학장은 함태영 전 한신대 학장의 아들인 함병춘 당시 청와대 특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심각하다”는 짤막한 말을 전했다. 그 순간 성북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이해학과 추요한이 총무과장을 통해 낸 자퇴서가 제출됐다. 교수들은 상을 치며 통곡을 했다. 결국 자퇴서를 받기로 하고, 나머지 두 학생은 나타나지 않자 제적하는 결의를 했다. 정보부원은 다시 들어와 “지금 무전으로 연락을 하려는데 연결이 안 되고 있다”며 “군대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학교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는 학생들의 피해를 막으려고 임시 휴업 조처를 하고 교수직 전원은 사임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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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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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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