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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1월부터 80년 5월까지 함께 생활했던 ‘새벽의 집’ 공동체 식구들. 74년 한신대 교수 전원 삭발투쟁 무렵에 찍은 사진이어서 필자(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삭발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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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6-1
“목사님, 말로만 공동체, 공동체 하면 뭐 합니까?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1971년 11월 어느 월요일, 수도교회의 최승국 청년회장 등 교인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쳐 나를 닦달했다. 바로 전날 주일예배 때 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공동체 운동에 대해 소개했다. 이들이 그 설교를 듣고 찾아와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책임지라고 나에게 도전한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을 비롯해 다섯 가족 15명 정도가 참가한 공동체인 ‘새벽의 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참 묘했다. 내가 의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1960년대 말 독일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를 읽었다. 산업사회가 개인주의, 물질주의, 권위주의로 인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사회라고 설파하는 프롬의 논지는 내 머리 깊숙이 박혔다. 70년 한 해 동안 미국의 유니언신학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으면서 흑인들의 해방신학을 연구했다. <로마클럽 보고서>를 통해 ‘현대 문명이 어떻게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지’ 경각심을 갖게 됐다. ‘죽음의 문화인 산업문화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화두가 되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수도교회 강단에 섰다. 설교시간에 나는 교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각자 자기 집에 꿀단지를 묻어두고 오는 것이 아니냐?” “교회에 와서도 생각은 직장에 있거나 집에 있는 게 아니냐?” “우리들 역시 극도의 개인주의와 경쟁주의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당시 세계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여러 공동체 운동을 소개했다. 그러자 교인들이 역습을 했다. 다소 급진적인 설교를 했던 내가 내 설교에 역습을 당하고 만 것이다. 예배가 끝나고 청년들끼리 다방에 가서 토론을 벌이다가 바로 우리 집으로 몰려와서 나를 옥죄었다. 나는 공동체라는 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고 말렸다. 그러자 청년들은 실천하지 않을 거라면 왜 설교를 했느냐고 따졌다. 청년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결국 우리는 일년 동안 준비기간을 갖고 공동체를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마다 모여 공동체를 연구하고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준비했다. 모든 수입을 한 통장에 넣고 필요에 따라서 나눠 쓰기로 했다. 우물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굵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지만 그 물은 누구나 필요한 대로 나눠 마신다. 우리도 우물처럼 그렇게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동료 교수 한 사람은 ‘쉬운 일이 아닌데 다시 생각해 보라’고 진지하게 충고를 했다. 어떤 목사는 ‘새벽의 집’이 성공을 하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라고도 말했다. 정말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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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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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11월30일 새벽의 집은 서울 방학동, 도봉산이 내려다보이는 자락의 작은 터전에 그렇게 둥지를 틀었다. “이제는 새벽이 와야겠다. 밝아 오는 새벽은 인간 능력 저편에서 비쳐오는 것이다. 나는 이 집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새벽의 집이라고 선뜻 그렇게 느꼈다. 교회 운동을 통해 내가 이제껏 숨 가쁘게 노력을 기울여 온 꿈이 바로 이런 모습의 공동체였기에 새벽의 집 탄생을 보는 내 감회가 실로 벅차다….” 새벽의 집 창립예배에서 김재준 목사가 해준 말씀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새벽의 집이라는 이름도 그가 지어준 것이었다. 흰 종이에 쓴 서약서에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모두 13명이 손을 얹고 서약을 했다. 우리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여러 가족이 한솥밥을 먹으며 생활하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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