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26 18:52
수정 : 2008.10.0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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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오적’ 필화사건으로 투옥된 아들 걱정에 울고 있는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 정금성(왼쪽)씨의 눈물을 필자(오른쪽)가 닦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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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6-3
서남동 목사의 별명은 ‘한국신학의 안테나’였다. 세계 신학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으면 그가 최근에 발표한 논문을 읽으면 됐다. 그는 민감하게 세계에서 논의되는 신학의 조류를 포착하여 국내에 재빠르게 소개했다. 전남 무안 출신인 서남동은 대구에서 목회를 하면서 참신한 설교로 인기가 많았다. 한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그는 연세대 교수로 옮겼다가 해직과 투옥을 거쳐 복직되던 해에 서거했다.
그는 1970년 8월,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서 열린 세계장로회 연맹 22차 총회에 몇몇 신학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신학자 교수들이 한국의 김지하와 그의 시 ‘오적’에 대해 이야기하며 높게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남동은 정작 자신은 김지하의 ‘오적’을 읽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 며칠간 머물며 김지하의 시를 구해서 읽었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그때부터 민중신학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동이 되어 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선포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서 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과 함께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유신체제 아래 한국 교회의 신앙고백이며, 한국적인 민중신학의 첫 선언이었다.
70년 나는 1년 동안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 교환교수로 다녀왔다. 그곳에서 세계적 흑인 신학자인 제임스 콘 교수에게서 남미에서 싹트던 해방신학을 배웠다. 이듬해 귀국한 나는 당시 캐나다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던 김재준 목사를 기려 경동교회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해방신학을 처음 소개했다. 또 미국에서 큰 감동을 받았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 <페다고지>도 알렸다. 이후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은 민중교육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교과서와 다름없었다. 남미와 흑인의 해방신학은 우리의 민중신학을 정립하는 데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서남동 목사와 안병무 교수는, 김용복 목사와 이화여대 현영학 교수와 서광선 교수와 더불어 한국의 민중신학을 정립한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조직신학자인 서 목사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하나님의 성령이 어떻게 우리나라 민중의 역사 속에서 임재했는지를 이야기했다.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평화시장의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조화순 목사가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한 산업선교 활동 등을 하나님이 실제로 한국에서 일으킨 사건이며, 이러한 민중의 사건과 성서의 해방 메시지가 70년대에 와서 비로소 만나게 됐다는 것이었다.
성서신학자인 안병무는 신약성서, 특히 <마가복음>을 민중신학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전태일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동안 지나쳤던 민중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75년 3월1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동길·김찬국 교수의 석방을 환영하는 모임이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그 모임에서 안병무는 처음으로 ‘민족, 민중, 교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 후 우리는 민중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마가복음에서 자주 쓰이는 ‘군중’이라는 단어 ‘오클로스’를 민중운동과 연결해서 해석했다. 그리고 ‘예수는 민중의 무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친구가 되었다’는 것, 민중 사건과 예수 사건은 불가분리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안병무와 서남동이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 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떨쳐 일어나는 결정적인 시기에 관심을 가졌다면 교육학자인 나는 그 과정에 관심이 있었다. 민중이 갖은 고생을 겪으며 의식이 점점 고조되어 때가 무르익게 되는 그 과정을 정리했다. 평소에는 역사의 주인처럼 보이지 않는 민중들은 오랜 고난을 겪는 과정에서 새 방향으로 나아가는 ‘득도’ 또는 김지하의 말에 의하면 ‘단’(斷)을 하게 된다. 원한과 죄악과 보복심으로 쌓인 묵은 생명을 끊어 청산하고 새 생명시대를 여는 것이다.
돌이켜 보니, 한국의 신학자들이 청년 노동자 전태일과 가톨릭 평신도였던 젊은 시인 김지하한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지하와 가깝게 지낼 일은 없었지만 감옥에서 한 번 만난 적은 있다. 내가 <사물의 영성>(Spirituality of Matter) 이라는 책을 읽고 박형규 목사에게 읽으라고 주었고, 그 책이 김지하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서대문구치소에 있을 때 운동하러 나갔다가 만난 김지하는 ‘그 책을 잘 보았고 고마웠다’고 말했다. 아들의 옥살이 뒷바라지를 하면서 애를 태우던 그의 어머니(정금성)는 재판정에서, 목요기도회와 농성장에서 늘 만나곤 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전형적인 시골 아줌마 같던 이분도 시위를 하면 맨 앞에서 싸우는 투사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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