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3월1일 흔히 ‘명동사건’으로 알려진 민주구국선언을 주동한 혐의로 필자와 형 문익환은 첫 구속을 당했다. 투옥 당시 목숨 건 단식을 한 문익환 선생의 78년 석방 직후 모습이다.
|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7-2
1976년 3월1일 형 문익환이 주동한 ‘3·1 민주구국선언’은 김대중·김영삼·윤보선 등 정치인들과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신·구교 종교인들이 동참함으로써 그 파장이 국내외로 번져 나갔다. 정작 서명을 했던 나와 동지들은 그렇게까지 큰 사건으로 확대될 줄 예상을 못했다. 그날 밤 성명서를 낭독했던 이우정 선생이 연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신여성 공동체’를 함께하던 양정신 목사에게 뛰어갔더니 “성명서를 왜 남자가 읽지 이 선생에게 시켰냐”며 나를 나무랐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감옥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복잡해서 나는 밤새 뒤척였다. 이튿날 새벽 집 식구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저희와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덩치 큰 형사 두 명이 거실로 들어왔다. 나는 두툼한 내복을 껴입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두 정보부원 사이에 끼여 앉아 남산 중앙정보부로 향했다. 나만 믿고 한국에 온 아내가 이 시련을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을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면서도 한구석에서는 ‘나도 이제 민족을 위해 감옥생활을 해보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감옥에 세 번이나 들어갔던 아버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에 앞장서 온 김재준 목사, 온몸으로 독재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장준하 형의 뒤를 나도 따라가고 있구나! 중정의 조사관들은 어제 명동성당에서 한 설교와 갈릴리교회 등에 대해 물었다. 이어 선언서를 주동한 것이 누구냐고 캐묻기 시작했다. “전태일이죠.” 내 대답에 “사람을 놀리는 거야. 어떻게 71년에 죽은 전태일이 이 일을 주동한다는 말이야!” 조사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폭발시킨 것은 분명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분신을 한 전태일이 맞았다. 그의 분신으로 충격을 받은 언론과 대학가, 종교계도 각성을 하고 민주화 운동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구체적으로 주동한 자가 누구죠?” 조사관이 다시 물었다. “갈릴리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같이하기로 이야기한 거지 따로 주동한 사람은 없어요.” 나는 주동자인 형을 밝히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김대중·윤보선과 연락을 한 것은 누구인지 따져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다”고 잡아뗐다. 아무도 주동자를 밝히지 않자 조사는 진전되지 않았다. 온종일 별 조사도 없이 끼니때가 되면 가져다주는 설렁탕을 먹고, 화장실에 가면 뒤따라와서 지켜보고, 잠자리에 들어도 옆에서 지켜보는, 지루한 며칠을 보냈다.
|
문동환 목사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