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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8월 새벽의 집에서 민주인사 석방을 요구하는 2차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보선 전 대통령과 부인 공덕귀씨, 김대중씨의 부인 이희호씨와 장남 홍일씨, 김상현씨, 그 뒤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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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8-1
‘3·1 민주구국 선언문’ 사건으로 2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온 우리들은 기장 총회 인권위원회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회를 열었다. 나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처럼 외로운 감옥 생활 속에서도 기쁨과 환희를 체험했다고 고백했다. 1978년 7월 초에는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발족시켰다. 각 단체의 대표들은 무더운 여름날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에 모여들었다. 이것은 69년 김재준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기에 나에게는 더 의미가 깊었다. 이 기구는 비록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전통을 세웠다. 국민연합 결성에 주도적인 구실을 한 것은 윤보선과 형 익환이었다. 참여한 단체들은 한국인권협의회, 기독자 교수협의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자교수협의회, 민주청년인권협의회, 동아언론수호투쟁협의회, 조선언론수호투쟁협의회, 민주회복구속자가족협의회, 양심수가족협의회, 전국노동자인권위원회, 전국농민인권협의회 등이었다. 나는 해직자교수협의회 부의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익환은 “민주화가 이룩되지 않고는 통일을 할 수가 없고, 통일을 이룩한다 해도 민주화가 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며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열변을 토했다. 이렇게 해서 형은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한 중심에 서게 되었다. 7월5일 우리는 윤보선·함석헌·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추대한 가운데 기독교회관에서 발기대회를 열었다. 이날의 분위기는 축제 같았으나 국민연합의 앞날은 험난했다. 40여 주도자들 옆에 네댓씩의 형사가 밀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익환은 이튿날 다시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 이렇게 되자 구속자가족협의회 식구들은 방학동 새벽의 집 유치원에 모여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마침 유치원은 방학 중이었다. 일생을 책과 같이 산 안병무는 책을 한 보따리 싸가지고 와 연구를 하면서 단식에 참여했다. 19일 형이 풀려나면서 단식 농성은 일단 끝났다. 그러나 곧이어 8월3일부터는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새벽의 집에서 두 번째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유인태·이현배·김하범의 어머니와 이해학의 부인이 단식에 참여했다. 내 어머니 김신묵과 김지하, 서광태의 어머니는 끝까지 버티다가 병이 나서 며칠 입원해야 했다. 공동체 운동을 하던 새벽의 집은 이제 민주화 운동의 요새가 되었다. 79년 6월23일 미국의 카터 대통령 방한을 맞아 전국의 거의 모든 민주화 단체들이 반대 성명을 냈다. 인권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그가 한국의 독재자를 만나러 온다니!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날 하루 내내 모든 민주인사들은 가택 연금을 당해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뒷문으로 해서 산을 넘어 우리가 시위를 하기로 한 종로 화신백화점 앞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도 전날 밤 밖에서 자고 나왔는지 약 20여명 가까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윤보선과 함석헌 선생, 정치인, 해직교수, 문인들이었다. 이에 동조하는 학생들과 시민들도 적지 않게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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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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