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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 진압하는 데 항의하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를 사복 경찰들이 끌어내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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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8-3
유신정권 시절을 생각하면 내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고, 나는 완전히 꼭두각시였다. 나는 농촌에 들어가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3·1 사건으로 감옥에 가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와이에이치(YH)무역 노동자들을 도와준 일로 또다시 감옥에 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더욱이 그 사건이 들불처럼 번져 박정희 정권을 끝장내는 도화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79년 8월8일 새벽, 사회선교협의회의 총무인 서경석 목사가 와이에이치 노동조합의 농성을 도와달라며 서대문의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으로 와 달라고 전화를 했다. 선교교육원은 해직교수와 제적생들이 모인 곳으로, 문교부 인가 없이 졸업증을 주고 목사 안수 자격을 줬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황급히 달려갔더니, 이문영 교수(고려대 해직)와 고은 시인, 서경석과 인명진(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목사가 있었다. 애초 서 목사는 그날 새벽에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친한 한완상 교수(서울대 해직, 전 교육부총리)에게 먼저 부탁을 했다. 그러나 한 교수는 그날 청평에서 새문안교회 청년들에게 강연을 해야 해서 오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 고 시인, 이 교수 셋이서 김 총재 집으로 찾아갔다. 김 총재는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았다. 우리는 와이에이치 여성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 신민당사로 갈 테니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보건사회부에 요청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당장 박권흠 대변인을 불러 여성노동자들을 당사에 받아들이도록 지시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노조원들은 두셋씩 조를 지어서 신민당사로 모여들었다. 나와 이 교수도 오전 10시께 마포에 있는 신민당사로 찾아갔다. 4층으로 올라가니, 200여명의 노조원들이 앉아서 주먹을 흔들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랜 투쟁에 지쳤을 텐데도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유행가에 자신들의 한 맺힌 사연들을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 감동을 받은 나는 노트와 펜을 꺼내서 가사를 적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그 노트는 손에서 손을 거쳐 맨 끝까지 갔다. 아무도 노래 가사를 적을 만한 실력이 없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이 여성들이 이렇게 단결하여 끝까지 투쟁을 할 수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모습은 내가 가지고 있던 미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이들은 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고 있었다. 66년에 장용호라는 재미동포가 자신의 이름을 따 설립한 와이에이치무역은 가발 수출 붐을 타고 정부의 막대한 후원을 받으며 직원이 4천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 가발제조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 사업을 시작하며 한국에서 번 돈을 빼돌리다가 급기야는 폐업을 하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노조원들은 회사를 살려 보려고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농성을 했다. 신민당사 농성 사흘째인 8월11일 새벽 2시 경찰 2천여명이 쳐들어와 노조원들은 물론 김영삼 총재와 당원들, 기자들까지 무자비하게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노조 집행위원장 김경숙이 21살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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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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