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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10일 오전 신민당사 농성 진압 하루 전, 필자는 서울 방학동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연행당했다. 뒤로 놀란 딸과 한신대 제자 김성재(전 문화관광부 장관)씨가 뛰쳐나오고 있다. 사진은 당시 고등학생인 둘째아들 태근이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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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8-4
인도의 간디는 “감옥 드나들기를 신방에 드나들듯이 하라”고 했다. 하지만 감방이란 마지못해 들어오는 곳이지, 어떻게 신방을 찾는 심정으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말이 말짱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1979년 8월 ‘와이에이치(YH)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 4동에 다시 들어갔다. ‘3·1 사건’ 때와는 달리 전혀 의도하지 않은 수감이라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함께할 수 있는 동지들도 많지 않았기에 외로웠다. ‘며칠 있다가 나가겠지’ 느슨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한 일은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할 수 있도록 말을 해준 것밖에 없으니 곧 석방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문영 교수 역시 그때 참으로 침울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도우려 했지만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결국 희생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노동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능함을 탓했다. 고은 시인도 그때 석방된 이후 노동학교를 조직하며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면회소 유리창 아래에 놓아뒀던 핸드백을 살짝 옆으로 옮겼다. 그 밑에 접어놓은 신문지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라는 굵은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머리에 갖다 댔다.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누가?” 그랬더니 아내가 다시 신문의 한 면을 보여주는데 거기에 ‘정보부장 김재규가 연회장에서 권총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면회가 끝나고 내 방으로 돌아오면서 커다란 목소리로 “박정희가 암살당했다!”고 외쳤다. 그날 저녁 자기 전에 동교동과 가깝게 지낸다는 교도관이 찾아와서는 신문지 한 조각을 주고 갔다. 나는 화장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그 기사를 읽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기까지의 과정이 실려 있었다. 와이에이치 사건 이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며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죽이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목숨을 내걸고 저항해 극악한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4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풀려났다. 내가 감옥에서 있는 동안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함석헌, 김병걸 해직교수 등 많은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이 또다시 갇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박정희 사망 뒤 후임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선출하려 하자, 재야인사들은 11월24일 명동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 회관에서 반대집회를 열었다. 계엄령 상태여서, 민청협의 홍성엽을 신랑으로 내세워 결혼식으로 위장을 하고 하객들을 초청해 집회를 연 것이다. 집회를 마치고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광화문에 이르자 이미 대기하던 전투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무지막지하게 진압을 했다. 이날 140명이 연행되고 14명이 구속됐다. 악명 높은 군 보안사에 끌려간 이들은 갖은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이들은 심지어 함석헌 선생의 수염을 잡아뜯으면서 수모를 주었다고 한다. 함 선생은 이 사건의 준비위원장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사실은 결혼식의 하객으로 왔을 뿐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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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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