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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7 18:57 수정 : 2008.10.08 18:17

1980년 5월 유럽 출장에서 귀국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자의반 타의반’ 망명을 하게 된 필자가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한국의 정치상황과 인권탄압 실태를 보고하고 있다.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9-2

그날 내 설교 제목은 ‘회개하라!’였다.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미국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설교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 신대륙으로 왔지만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고, 나라의 힘이 커지자 자본과 무력으로 주변 국가들을 수탈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한국이 겪는 고난도 미국의 국익 때문이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격했지만 그때의 내 심정은 그런 것이었다.

1980년 5월 졸지에 ‘망명객’이 된 나는 뉴욕에서도 가장 크고 진보적인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록펠러의 후원으로 지은 곳으로, 허드슨 강변 옆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미국 목회자도 오르기 힘든 강단에 서서 영어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한국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그 며칠 전에는 같은 교회에서 광주학살 사건에 대한 강연을 했다. 나를 맞아 미주 민주화 운동 동지들이 긴급 강연회를 준비한 것이었다. 나는 그 높은 강단에 올라서 큰 교회를 꽉 메운 청중들을 보면서 감격에 사로잡혔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크리스천들이 우리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다. 그 강연을 들은 윌리엄 슬론 코핀 2세 박사가 내게 주일 설교를 부탁한 것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교인이 한국을 위해 쓰라며 1만달러짜리 수표를 전해주기도 했다.

뉴욕주의 스토니 포인트에 있는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연수원에서 초대를 받아 일년 동안 지내게 됐다.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 천지는 물론 캐나다, 일본, 유럽을 돌아다니며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소식을 널리 전파했다. 때때로 워싱턴디시에 가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앤드루 영 유엔대사 등 미국의 정치인들을 만나서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는 데 스스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단체들과도 힘을 합했다. 특히 매월 첫째 목요일에 모여 한국 소식을 나누는 기도회는 침울한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다. 한국에서처럼 뉴욕에도 ‘목요 기도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승인·김윤철 장로, 임순만 목사가 이 모임의 기둥이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로 일하다가 1977년 미국으로 건너온 구춘회 선생도 이 모임의 열성 멤버였다. 서울에 있을 때 종로5가 그의 사무실은 민주화 운동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또다른 단체는 ‘기독학자협의회’로, 내가 70년대에 유니언 신학교에 방문교수로 왔을 때 김용복 박사가 주도해서 시작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을 위해서는 손명걸 목사가 미국 교회로부터 많은 재정적인 후원을 얻어주었다.

‘3·1 선언 사건’ 때 석방 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한국 민주화를 위한 북미주연합’은 아버지 문재린과 김재준·이상철 목사를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함께해 든든한 힘이 됐다.

문동환 목사
북미주지역 미국 교회들이 조직한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주연합’도 있었다. 이 조직의 의장은 미국연합감리교의 세계선교회 총무인 페기 빌링스였다. 그는 젊은 시절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유능한 지도자였다. 이 단체에서는 하비 목사를 워싱턴으로 파견해 미국 의회에서 적극적인 로비 활동을 벌였다. 하비 목사는 말을 잘하고 외교에 능하여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세계연합’과도 인연을 맺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이승만 목사, 미국감리교 국내선교 총무인 손명걸 목사, 캐나다의 이상철 목사, 아시아 기독청년협의회 총무 오재식 선생, 일본 교단의 김인하 목사 등이 한국교회연합회 총무인 김관석 목사와 긴밀하게 연락을 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썼다. 이들은 한국의 소식을 온 세계에 전파할 뿐 아니라 세계 교회를 동원해 군사독재에 종지부를 찍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동안 일심동체로 일해온 동지들이 노선의 차이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른바 ‘선민주·후통일이냐? 선통일·후민주냐?’ 논쟁이었다. 대체로 이북이 고향이고 미국에 온 지 오래된 이들은 먼저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쪽에서 온 동지들은 민주화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서로 내게 화해시켜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각자 자기가 믿는 길로 가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그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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