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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23 18:33 수정 : 2008.10.08 18:15

1987년 2월 전국적으로 벌어진 군부 정권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추모와 규탄 시위에 참가한 필자(가운데)가 부인 문혜림(왼쪽)·형수 박용길(오른쪽)씨와 함께 종로 거리에서 입마개를 쓴 채 최루가스를 견디고 있다.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0-1

“아! 사모님도 나오셨군요. 한국으로 시집오셨기에 이런 활극을 다 구경하십니다.” 1987년 2월3일 김병걸 교수가 다방으로 들어서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며칠 전 폭로된, 서울대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한 끝에 죽은 사건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진 날이었다. 나도 아내와 형수 박용길과 함께 종로 거리에 나왔다. 거리를 뒤덮은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이 따갑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약방에서 마스크를 사서 쓰고 있는데 한 대학생이 다가와 치약을 건네주면서 ‘눈을 비비시면 안 된다’고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 학생 말대로 눈썹과 눈 밑에 치약을 바르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리 모습에 김 교수는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은 장면이라며 웃었다. 청계천을 지나 다시 명동성당으로 가려는데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를 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눈처럼 하얀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알고 보니 도로변 높은 건물들에서 종이를 잘게 썰어 뿌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화이트칼라층까지 합세를 하면 역사는 변하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상기된 목소리로 김 교수에게 말했다.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철폐를 외치는 구호가 나날이 커져 가던 6월9일 연세대 이한열군 사망사건이 또 터졌다. 최루탄에 맞은 한열이가 피를 흘리며 친구에게 안겨 있는 비참한 사진이 신문에 나자 반독재의 불길은 휘발유를 끼얹은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우리 동지들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 모였다. 이돈명·이상수 변호사, 성내운·이문영 교수, 이우정 선생, 이해동·김상근 목사 등이 그 자리에 왔던 걸로 기억한다. 격변하는 사태를 이끌고 갈 운동 주체가 없었다. 형 익환은 민통련 의장 취임 직후인 85년 5월 ‘대학생 분신 배후조종’ 등의 이유로 3년형을 받아 4번째 옥살이 중이었다. 우리는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새로운 운동 주체를 만들기로 하고 그 이름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로 정했다. 모두들 내게 형을 이어 의장을 맡으라고 권유해 주저스러웠지만, 누군가는 이 시급한 상황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대변인은 이상수 변호사가 맡았다.

정권은 더 버티지 못하고 노태우를 시켜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라 형 집행정지로 7월9일 아침 전주교도소에서 풀려난 형은 한열이의 장례식장인 연세대로 곧장 왔다. 그는 연단 위에 올라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혼신의 힘을 모아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하며 26명의 이름을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그길로 우리는 민주 동지들과 손을 잡고 연세대를 나와 묵묵히 걸어갔다. 시청 앞을 메운 인산인해를 보면서 나는 ‘역사를 새 차원으로 길어올릴 거룩한 백성들’이란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한열이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을지로를 향해 떠나는 것을 보고 있는데 민통련의 이해찬 동지가 내 손을 꽉 잡으면서 말을 했다. “문 박사님, 기어이 역사가 바뀌는군요.”

문동환 목사
그렇게 직선제는 쟁취됐지만 대통령 후보를 두고 야권은 갈라지고 있었다. 결국 민통련에서는 김대중·김영삼 두 후보에게 질문을 해서 그 답변 내용에 따라 후보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김대중 쪽의 정견이 훨씬 더 우수하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김영삼 쪽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은 나를 보고 답답한 심정을 한탄했다. “도저히 성사되지 않는 단일화를 하려고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고, 그대로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자니 우리들 사이가 갈라지고….” 우여곡절 끝에 민통련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기로 했다. 투표 하루 전날 저녁, 우리 동지들은 동교동에 모여 의논했다. ‘이제라도 김대중 후보가 사퇴를 해서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 중 몇 명은 사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은 그가 이길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선거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엄청난 부정선거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 후보는 3위에 머물렀다. 우리는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형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혜화동의 보나벨뚜라 수도원에서 무기한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김대중 후보도 마지막 순간 사퇴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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