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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24 18:50 수정 : 2008.10.08 18:15

1988년 2월 민통련 등 재야 인사 100여명의 평화민주당 입당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김대중 총재(왼쪽)와 필자(오른쪽)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0-2

1987년 12월16일 대선의 야권 패배 책임과 부정선거에 항의하고자 시작한 형 익환의 단식은 3주를 넘어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혜화동 부나벨뚜라 수녀원으로 찾아간 내게 형은 “아직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팔뚝의 근육을 자랑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어린 소년 같았다. 그날 아침 일찍부터 나는 이돈명 변호사, 성내운 교수, 예춘호 선생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야당 통합은 불가능한 것 같으니 평화민주당을 밀어줘야 한다’며 나더러 앞장을 서라는 요구들이었다. “김대중 선생이 문 박사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미국에서도 함께 계셨고 해서 신임을 하는 모양입니다.” 예 선생의 말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김 선생은 미국에 있을 때 늘 내게 너무 솔직하다고 충고를 하곤 했는데 말이다. “저는 고지식하고 직설적이어서 정치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딱 잘라 거절을 했다. 사실 그때 한신대 총장 물망에 올라 있었던 까닭에 내 머릿속은 온통 학교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하는 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형과 나는 모든 것을 서로 의논할 수 있는 좋은 친구였다. 이번에도 형은 내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해 줬다. “이미 몸을 더럽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더럽히지 말아!” 나는 한결 가벼워진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자이자 동지인 김상근 목사도 설득했다. “김 선생 옆에 문 박사님 같은 분이 계셔서 충고를 해야 합니다.” 며칠 뒤에는 안병무 박사가 직접 집으로 찾아와 입당을 권하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 박영숙씨는 이미 평민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는 민통련의 핵심 인물인 이해찬 동지가 찾아왔다. 그는 민통련의 많은 동지들이 평민당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른으로 나를 모시고 들어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통련 의장인 형을 제치고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것은 꺼림칙했다. “문 박사님, 정치도 민주화운동의 연장입니다. 누가 자격이 있어서 민주화운동을 했습니까? 해야 하는 일이니 했지요.”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한신대 총장 선거에서 주재용 교수에게 밀려 떨어지고 말았다. 상대 후보 쪽에서는 나를 꿈만 꾸는 이상주의자라고 역선전을 했다고 했다. 나는 후배 목사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선거운동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있었기에 크게 실망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김상근 목사와 안병무 박사 모두 나의 낙선을 섭섭해하는 눈치는 없고 계속 정계로 밀기만 했다. 훗날 알게 됐지만, 이들은 이미 나를 정계로 보내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새벽 나는 환상을 보았다. 박영숙 선생과 김대중 선생이 깊은 시름에 잠긴 얼굴이 보였고 그 뒤에서 민중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본 환상이었지만 ‘민중들이 내게 나오라고 하는구나!’ 이해하고 결단을 내렸다. 그즈음 김 선생은 박 선생에게 “이젠 정치를 다 집어치워야 하겠군요. 문 박사가 젊은 동지들을 이끌고 들어와야 하는데 끝내 거부하면 이젠 재기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니까!”라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또다시 하느님의 발길에 차여, 내 성정에도 맞지 않는 ‘정치’라고 하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문동환 목사
87년 대선 참패의 후유증은 깊고도 컸다. 같은 뜻으로, 옥고를 함께 치르며, 민중의 고난 현장에 뛰어들었던 동지들이 서로 맺힌 감정의 응어리들을 풀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나는 그 쓰라림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설움 받는 민중의 아픔을 어떻게 역사 속에서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평민당 입당은 민중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당시 상황에서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대선 실패의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스스로 걸머져야 한다는 심정이 앞섰다. 신학자로서, 목사로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목회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또 나 같은 사람이 정치에 뛰어듦으로써 그동안 피나는 고생을 해온 많은 후배 동지들의 길을 열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더러운 흙탕물이라고 정치인들에게만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역사의 방관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결단을 하고 나니 주변의 오해나 비난 같은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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