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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16일 최규하 전 대통령(가운데)의 ‘광주 청문회’ 증언을 요구하고자 서울 서교동 자택을 방문한 필자(오른쪽)와 국회 특위 관계자들이 ‘출석 거부’ 답변만 듣고 집을 나서고 있다. 맨 뒤쪽으로 신현확 전 총리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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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10-3
1988년 2월 평민당 입당 행사에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익환 형이 말했다. “전에는 네가 나에게 솔직한 충고를 많이 해주었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너한테 충고할 테니 그리 알아!” 형은 “무엇보다도 통일에 관심을 가져야 해” 하며 내 무릎을 탁 쳤다. 형이 서야 할 자리에 내가 선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형이 있다는 게 무한히 고마웠다. 재야의 젊은 청년들과 함께 정치권에 들어가서 처음 맞은 도전은 4월26일 국회의원 선거였다. 김대중 총재는 내가 종로구에 출마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정치를 계속할 사람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젊은 민주인사들의 입문을 위한 접목제로 들어온 것이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정치를 할 유망한 인물이 출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나는 극구 사양했다. 대신 전국구 후보로서 전국을 돌며 특히 평민련의 후보들을 위해서 지지 연설을 했다. 강진의 김영진, 무안의 박석무, 광주의 정상용, 전주의 장영달, 성북의 이철용, 관악의 이해찬, 중랑구의 이상수, 노원구의 임채정 후보 등의 유세를 집중적으로 도왔다. 유세를 하다 보니 말주변이 좋은 정치가들은 쉽게 영웅주의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들이 아우성을 치면 호응해주는 순간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분서주한 결과, 우리는 예상 밖의 결실을 얻었다. 평민당은 71석으로 일약 제1야당이 됐고 그 가운데 평민련 후보가 무려 20석이나 차지했다. 일단은 정계 입문의 명분을 얻은 셈이었다. 이후 4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무래도 88년 11월 시작한 ‘광주 청문회’일 것이다. 지금도 택시를 타면 기사들은 내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로 ‘광주 청문회 위원장 하시던 분이 아니냐’며 반가워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광주 청문회에는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내 말투가 어눌하고 느리다며 답답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평민당에서 맡기로 한 날 나는 퍽 흥분했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김 총재는 내게 특위 위원장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광주에서 일대 참극이 벌어지고 있을 때 미국에 있었던 까닭에 당시 진상을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주저했다. 그러나 곧 이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맡기로 결심했다. 11월18일 문을 연 광주 청문회는 이듬해 12월30일까지 일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특위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피해 시민들의 애끓는 증언은 청취자들의 공감과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김옥길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해 우리를 크게 실망시켰다. 최규하 전 대통령도 끝까지 증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최 전 대통령에게 직접 찾아갔다. 요지부동인 그에게 나는 “최 대통령은 역사가 뒤바뀌는 때 해야 할 일을 바르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역사 앞에 밝히는 일마저 하지 못한 비겁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고 말았다. 지금도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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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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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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